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제23회 감바라의 눈, 소빙기와 우키요에

블루트레인 2011. 12. 10. 10:58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23> 감바라의 밤 눈, 소빙기와 우키요에
따뜻한 지역에 폭설 풍경? 상상 아닌 현실이었다

 

[국제신문] 2011년 9월 22일

 

 

일본 유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린 '도카이도(東海道) 53역참' 중 '감바라(蒲原)의 밤 눈'(1833년께).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첫 장면. 짧지만 강렬한 이 문장은 심장을 두들긴다. 기차는 멈추고 우리는 온통 하얀 빛깔로 가득 찬 눈의 세계로 빨려든다.

서정성 넘치는 풍경을 잘 묘사했던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 1832년 가을, 그는 다이묘의 수행원으로 에도에서 교토에 이르는 도카이도(東海道)를 여행할 기회를 얻는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도중에 느꼈던 신선한 감동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 '도카이도 53역참' 연작이다. 소개된 그림 '감바라의 밤 눈'은 그 중의 하나이다.

온통 하얀 눈 세상이다. 소복하게 쌓인 눈은 밤의 어둠마저 밀쳐내어 산들은 투명하고 쓸쓸하다. 소설 속 주인공 시마무라가 터널을 지나 보았던 '설국'도 이러했으리라. 그런데 이런 감흥도 잠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감바라에 내리는 눈? '설국'의 실제무대인 니가타 현의 에치고유자와 온천 지역과는 달리, 시즈오카 현의 감바라는 따뜻한 지역이라서 한겨울에도 눈 쌓이는 일이 좀처럼 없다. 그렇기에 어떤 이들은 이런 겨울풍경을 히로시게의 상상으로 보기도 한다. 과연 그러할까?

1830년대 서늘하고 차가운 날씨가 다시 일본을 엄습했다. '도카이도 53역참'이 완성되었던 1833년은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도 시대 최대 기근의 하나인 텐포대기근(1833~1840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해이다. 일본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대기근의 주된 원인은 냉해였다. 여름과 가을에 한랭한 날씨가 계속되면서 곡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여 흉작이 되었다. 사람들은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입어야할 정도로 추웠던 해가 많았다.

히로시게가 감바라를 여행했던 그해 겨울, 중국 전역에도 큰 눈이 내렸다. 하북, 하남, 산동 등에는 눈이 1m 이상이나 쌓여 대나무와 가축이 동사하고, 심지어 사람마저 얼어 죽었다. 좀처럼 눈이 내리지 않는 복건과 광동에서도 그 전 해부터 폭설이 내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열대인 강남에서는 급작스럽게 밀어닥친 추위로 얼어붙은 논에서 벼를 수확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감바라의 밤 눈'은 1832년 겨울 히로시게가 직접 보고 경험한 장면이다. 같은 연작에 속하는 '눈 그친 가메야마'에도 당시 폭설이 내린 가메야마의 겨울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15년이 흐른 뒤 히로시게는 자신의 풍경화들은 그가 직접 본 모습을 바탕으로 했다고 밝힌 바가 있다. 눈 내리는 감바라의 겨울풍경은 히로시게의 상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그와 더불어 에도 후기를 대표하는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호쿠사이의 1833년 작품 '류큐 8경'에는 놀랍게도 오키나와에 눈 내린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이듬해의 '제국명교기람'에도 눈 내린 부교를 건너는 여행자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1830년대 전반의 눈 내린 겨울 풍경이 우키요에 화가들에게 얼마나 짙은 인상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감바라의 겨울풍경에 들어가 보자. 그림 속 농부들의 뒷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그들의 처진 어깨는,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헐의 '눈 속의 사냥꾼'(4회 참고)에서, 사냥을 마치고 힘없이 돌아오던 농부들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소빙기의 겨울풍경은 예술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고, 인간의 감성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하늘과 땅, 산과 바람을 닮아 있다.

 

소빙기라는 긴 시간의 터널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감바라에서 '설국'을 만나게 된다. 그림 속, 감바라에 내리는 밤 눈은 눈송이인가 별빛인가?  "발에 힘을 주어 올려다 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