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제22회 남한산성, 혹한의 나날들

블루트레인 2011. 12. 10. 10:48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22> 남한산성, 혹한의 나날들
조선군, 추위·식량고갈로 청에 무릎

 

[국제신문] 2011년 9월 15일

 

 

 

청나라 2대 황제 홍타이지의 초상.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7),

 두 차례 전쟁을 통해 조선을 통제했다.

 

1637년 2월 24일 인조는 삼전도에 있었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지 46일 만의 출성(出城)이었지만 결코 영광스러운 자리가 아니었다. '오랑캐'의 황제에게 올린 예는 세 번 무릎을 굻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한 순간이었다.

어떤 면에서 병자호란은 미스터리한 전쟁이다. 어떻게 그렇게 무기력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을까? 전쟁은 사실상 남한산성에서 시작되어 남한산성에서 끝났다. 산성에서 버티는 동안 조선군은 공포스런 팔기군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강력한 적과 싸워야 했다. 매서운 추위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했던 그 해 겨울은 17세기 대부분의 겨울들처럼 매우 추웠다. 평안도와 황해도 바다에는 얼음덩이가 떠다녀 선박을 운항할 수 없었다. 중국에서는 아열대인 강남의 황포가 얼어붙고, 남부 광동성 복건성의 열대과일은 물론 가축과 물고기마저 얼어 죽었다. 청군은 이러한 혹한을 이용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처럼 한양으로 내달았고, 그 무시무시한 속도에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들어갔던 것은 1월 9일 밤이었다. 그러나 산성은 고립되기 쉬웠고 식량도 충분히 비축되어 있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인조는 강화도로 가기 위해 산성을 나섰지만 거센 눈보라가 어가를 막았다. 인조도 말에서 내려 얼음길을 걷다가 수차례 자빠지고 엎어져 몸만 상하고 산성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마저 날씨가 뭉개버렸다.

청군에 포위당한 남한산성은 점차로 고립무원의 성이 되어갔다. 얼어붙은 산성은 철기를 방어하는 데 용이했지만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혹한의 날씨와 식량부족, 이것은 성밖의 청군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병사들은 거친 바람과 차가운 날씨에 손과 발이 얼어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병사들을 지켜줬던 것은 '공석(空石)', 곧 빈 가마니였다. 이것마저 부족하여 많은 병사들이 추위에 노출되어 서로 대화마저 나눌 수 없을 지경이었다. 1월 19일에는 진눈깨비가 그치지 않자 얼어 죽는 병사들이 많았다. 인조는 날씨가 개이게 해 줄 것을 하늘에 빌었다. 간절한 기도에도 추위는 계속되었고, 이후에도 얼어 죽는 병사가 속출했다.

인조가 기도를 올리던 그때 말 먹이는 고갈되어 병사들은 말을 잡아먹기에 이르렀다. 이제 더 이상 기병을 활용할 수도 없었다. 20일 뒤에는 병사들의 하루 양식을 3홉으로 줄였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상황이었다. 청군과의 대대적인 전쟁도 없는 상태에서 조선군은 산성 안에서 추위와 식량고갈로 전투력을 상실해 갔다.

임진왜란 때 거침없이 밀고 올라오던 왜군을 막은 것은 겨울의 혹한이었다. 이에 반해 청군은 겨울의 혹한을 침략의 호기로 이용했다. 추운 날씨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왜군에 비해 만주의 혹한에 단련된 그들에게 조선의 겨울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병자호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홍타이지는 일찍이 "너희 나라가 산성을 많이 쌓았으나, 내 당당히 큰길을 따라 갈 것이니 산성이 나를 막을 것이냐? 너희 나라가 강화도를 믿는 모양이나, 내가 조선 팔도를 짓밟을 때에 그 조그만 섬에서 임금노릇을 하고 싶으냐?"라고 일침을 가했다. 하지만 인조는 "조그만 섬"에 가지도 못하고서 남한산성에서 46일을 보내다 허망하게 항복했다. 전쟁에 대한 어떠한 대비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채.

 

그날은 인조에게 무척이나 긴 하루였으리라. 그가 돌아오는 길에 청에 끌려가던 조선의 자녀들이 외쳤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정권 때문에 백성들에게는 더 참혹한 삶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