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朝․淸어업분쟁은 230여 년(1684~1910)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1882년에서 1910년까지 30여 년간을 살펴보았다. 이 기간은 동아시아 3국이 근대세계로 전환되는 격동의 시기였다. 조선의 해양을 둘러싼 淸日간의 어업경쟁도 그만큼 극심했다.
1882년 체결된 朝淸貿易章程은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제3조에 어업조항이 들어감으로써, 황해도와 평안도의 해면이 청국어민에게 개방되었다. 이전까지의 불법어업이 합법화되었던 것이다. 다음 해에는 朝日通商章程이 체결되어,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의 해면이 일본어민에게 개방되었다. 이로써 조선의 해양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해양환경의 변화이다. 19세기 후반은 소빙기(Little Ice Age)에서 20세기 온난기(Warm Period)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조청무역장정 제3조 어업규정은 해양환경의 변화에 따른 청어의 이동을 반영하고 있다. 청어야말로 朝淸貿易章程 제3조 어업규정의 실제적인 배경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자 12년 동안의 합법적 어업은 종식되고 密漁시대로 전환되었다. 일본의 어민이 대거 밀려오자, 청국어민의 어업활동은 위축되었다. 청은 1901년 통어장정을 맺으려 했지만, 한국정부의 거부로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1900년 경기도에 대한 어업권을 획득했다.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빌미로 황해도․평안도․충청도의 어업권마저 획득했다. 이로써 일본의 우위가 확립되었다. 일본은 1909년 4월 1일의 한국어업법 시행을 앞두고 청 정부에 한청어업협정을 제안했다. 청 정부는 이것이 결국은 일본이 중국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것임을 간파하고 거부했다. 이에 일본은 艦隊를 이용하여 청국어선을 한국 해양에서 축출했다. 이로써 2백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청국어민들의 불법어업은 종식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19세기 후반의 기후변동으로 인한 해양환경의 변화는 朝淸貿易章程 제3조 어업규정의 보이지 않는 배경이었다. 물론 이것이 국제적 정세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해양를 둘러싼 청․일간의 경쟁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맺음말]
이상에서 1882년에서 1910년까지 30여 년간의 조선과 청의 어업분쟁을 살펴보았다. 230여 년의 장구한 조청어업분쟁의 역사에서 이 30여 년의 기간은 한․중․일 3국이 근대세계로 전환되는 격동의 시기였다. 그 한 가운데 조선의 바다가 있었다.
제3기(1882-1894)는 조청무역장정의 체결에서 청일전쟁까지로 청국어선이 합법적으로 조업했던 시기였다. 그 법적 근거가 되었던 것이 朝淸貿易章程 제3조였다. 여기에는 조선의 황해도․평안도, 중국의 산동성․봉천성에 양국 어선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고기잡이할 수 있게 규정했다. 조선의 어업이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청국어민의 한국해양 침탈을 합법화하는 일방적인 조치였다. 다음 해에는 일본과 朝日通商章程을 체결하여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의 해양을 일본어민에게 개방함에 따라, 한국해양을 둘러싼 청과 일본 간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해양환경의 변화이다. 19세기 후반은 근세 소빙기(Little Ice Age)에서 20세기 온난기(Warm Period)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조청무역장정 제3조 어업규정은 기후변동에 따른 청어의 이동을 반영하고 있다. 1850년대 이후 산동과 요동에서 청어가 사라져버리자, 청국어선들이 청어를 쫒아 대거 조선의 서해안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청어야말로 조청무역장정 제3조의 실제적인 배경이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청어가 서해안에서도 사라지고 있었다. 청국어민은 조선어민들이 어획한 청어를 약탈하는 등 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890년대 이후 서해에서 청어가 완전히 사라지자, 이를 대신해 갈치․준치․조기 등 새로운 어종을 찾아야했다.
제3기 동안 한국해양에서 우위에 있던 것은 청이었지만, 점차로 일본의 도전을 받게 된다. 청국어민들은 조청무역장정에서 규정된 범위를 넘어 충청도․전라도까지 넘어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일본어민들도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전라도에서 점차로 충청도․경기도로 어업구역을 확대하려 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과 여러 차례 어업협정을 체결하여, 실제적인 이권을 장악해나갔다. 1888년 일본이 인천근해에 대한 어업권을 획득하자, 청도 1891년 이를 강력히 요구했다. 남하하는 청과 북상하는 일본이 인천에서 어업권을 놓고도 충돌하게 된 것이다.
제4기(1894-1910)는 청일전쟁에서 한국병탄까지이다.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고, 이전에 맺은 조약들이 모두 폐기되자 청국어선들이 한국해양에서 조업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사라졌다. 12년(1882-1894)의 합법적 어업활동시기가 끝나고 불법적인 어업시기로 전환된 것이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어선이 대거 밀려오자, 청국어민의 어업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법어업의 규모는 여전히 상당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전의 조약이 폐기된 이후 얼마지 않아 새로운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어업협정은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청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은 1901년의 일이었다. 이 해에 청은 어업협정을 맺으려고 시도했지만, 한국정부의 거부로 끝내 실패했다.
러일전쟁은 황해도․평안도에 불법 조업하던 청국어민의 활동마저 위협했다. 1900년 경기도에 대한 어업권을 획득했던 일본은 러일전쟁을 빌미로 황해도․평안도․충청도에 대한 어업권마저 획득했다. 일본어민이 황해도․평안도로 진출하게 됨에 따라 이곳은 3국의 어민이 경합하는 장소가 되었다. 일본의 조사에 의하면 당시 불법조업을 하던 청국어선은 3천여 척으로 사실상 평안도․황해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던 일본은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오히려 중국해양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일본은 1909년 4월 1일부로 한국어업법 시행을 앞두고, 청 정부에 한국과 어업협정을 맺을 것을 제안했다. 한국의 평안도․황해도․경기도와 중국의 산동․봉천․직예의 해양을 양국 어민들에게 개방하자는 것이었다. 청 정부는 이것이 결국은 일본이 중국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것임을 간파하고 거부했다. 이에 일본은 함대를 이용하여 순찰을 강화하고 청국어선을 한국해양에서 축출했다. 2백여 년 동안 지속되었던 청국어민들의 불법어업은 이로써 일단락되었다. 한국의 해양을 둘러싼 어업경쟁에서 청은 완전히 밀려났다. 일본이 한국을 완전히 강점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기억해야할 것은 조청무역장정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어업은 통상과는 별개의 문제였다는 점이다. 청은 서해에서 자국의 청어잡이 어선들을 보호하기 위해 통상조약에 어업조항을 포함시켰다. 조선은 4일간의 짧은 검토를 통해 조선의 바다를 개방하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혹독했다. 조청무역장정 제3조 어업규정은 일본을 자극하여 조선의 바다를 둘러싼 청일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바다의 막대한 해양자원도 청과 일본의 어선들에게 유린당하고, 이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를 빌미로 각종 이권을 빼앗기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韓國漁業令이 시행되면서 일본은 실제적으로 한국의 바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韓國水産誌 제1권이 출간되었던 것이 1908년 12월이었다. 이때에 이르면 일본이 학문적으로도 이미 한국의 바다를 지배했던 것이다. 일본이 뭍을 병탄하기 이전에 바다를 먼저 병탄했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19세기 후반의 기후변동이 이러한 국제적 정세변화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의 해양을 둘러싼 청․일간의 경쟁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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