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음말]
최근 제프리 파커(Geoffrey Parker)는 17세기 중반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동시적으로 국가체제의 붕괴가 있었음을 재조명하면서, 당시의 위기를 “지구적 위기(Global Crisis)”로 표현하고 있다. 명청교체는 小氷期로 인한 “지구적 위기”의 일부분이었다.
본고는 이러한 관점에서 17세기 강남 구황론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명말청초는 중국 구황론의 전개에서 주목할 만한 시기였다. 명말에 이르면 이전에 비해 현저하게 많은 황정서와 구황론이 등장하고 있다. 내용면에서도 이전의 황정서가 주로 송대 董煟의 救荒活民書를 증보하던 수준이었던 데 반해, 명말청초에는 실제적인 재해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론적으로 새롭게 다듬어졌다.
강남의 구황론이 명말에 집중적으로 출현하는 것은 소빙기 기후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대 황정서의 대부분은 소빙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580년대 이후에 편찬되었다. 강남의 다양한 구황론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실은 강남의 구황론이 소빙기의 기후변동과 재해로 인한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대해 강남의 신사․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였다.
흥미로운 것은 강남의 구황론이 명말에 집중되어 있고, 청초에는 현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명말과 청초의 이러한 차이는 국가의 황정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명말, 재정의 고갈과 萬曆帝의 怠政이 겹치면서 명조의 황정체제는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다. 이에 더하여 동북 여진족의 침략과 농민반란이 확대되면서 현실적으로 국가의 황정을 기대할 수 없었다. 소빙기의 재해와 왕조멸망의 위기 속에서 강남의 신사․지식인들은 지방 행정당국과의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 주도적으로 구황활동을 펼치면서 지역사회를 안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청조는 황정에 대한 국가의 주도적 역할을 회복하고, 효율적인 황정조치를 통해 재해를 극복해나갔다. 乾隆 5년(1740)에 완성된 康濟錄과 授時通考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救荒書와 農書를 간행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명말 구황활동을 주도하던 신사․지식인들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다. 국가 황정의 효율적인 운용으로 신사․지식인들의 역할은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명말과 청초, 강남의 구황론은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명말청초의 강남 구황론은 소빙기라는 기후변동 속에서 명조의 실패와 청조의 성공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본 연구에서는 17세기 강남 구황론의 전개과정을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다만 실제적인 ‘황정’ 자체보다는 ‘救荒論’에 집중했기 때문에, 이러한 구황론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었는가는 살펴보지 못했다. 예컨대 만력 36~37년의 재해 때의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구황활동, 숭정 13~15년의 대기근 때 陳龍正, 祁彪佳, 張采의 구황활동 등은 세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이런 문제들은 앞으로 과제로 남겨 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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