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맺음말]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의 해양은 국제적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해역을 둘러싼 어업분쟁도 그 중의 하나이다. 동아시아 해양에서 어업분쟁은 현재적인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전근대사회에서 어업분쟁이 외교적으로 중요한 사안이었던 적도 있었다. 조선의 해양에서 청 어민의 불법어업이 그런 경우이다. 조선과 청 사이의 어업분쟁은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국가’ 간의 외교문제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조선 전기 對馬島 왜인의 어업활동보다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럼에도 이 문제에 주목했던 연구는 전무하다.
조선과 청의 어업분쟁은 1910년까지 대체로 4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본고는 그 중에서 1684년에서 1882년까지, 200여 년을 대상으로 했다. 이것은 4단계의 변화 중 제1기와 제2기에 해당하며, 1882년 『조청무역장정』에 의해 합법화되기 이전의 불법어업 기간이다.
제1기(1684~1842)는 淸朝가 臺灣을 수복한 이후 海禁令과 遷界令을 해제했던 1864년부터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고 맺어진 南京조약까지의 160여 년을 다루고 있다.
청의 불법 어선이 서해안에 출현하기 시작하는 것은 1680년대부터였다. 이것은 1684년 청조의 海禁令 해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海禁令이 풀리면서 조선과 인접한 山東과 遼東의 어민들이 대거 서해안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이들의 규모도 점차로 커져 갔다. 수십 척의 배에 수백 명의 청 어민이 황해도 연안과 도서지역에 출몰했다. 이들은 불법어업에 그치지 않고 약탈과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 당시 조선의 해양 방어 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조선 정부는 결국 외교적인 방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것은 조선과 인접한 遼東의 연해지역을 철저히 통제해 줄 것을 요청하는 ‘咨文’을 보내는 것이었다. 1882년 이전, 200여 년 동안 불법어업 통제를 요청하는 咨文은 20여 차례나 되었다. 이런 요청에 대해 淸朝는 遼東 연해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조선 해양에서의 불법어업을 금지하는 법률을 『大淸律例』의 한 조문으로 만들 정도로 적극적이었지만 전혀 효과를 볼 수 없었다. 康熙 51년(1712) 청의 불법어민을 “賊寇”로 간주하고 “剿緝”할 것을 명할 정도로 강력한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지만, 청 어민의 불법어업은 줄어들지 않았다.
제2기(1842~1882)는 청의 海禁체제가 완전히 붕괴되었던 1842년의 南京조약부터, 『조청무역장정』이 체결되었던 1882년까지의 40년 동안이다.
제2기는 불법어업이라는 점에서는 제1기와 동일하지만 그 성격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중국의 해금체제가 완전히 붕괴되면서 청 어선의 불법어업은 더욱 격렬해졌다. 규모 면에서 수백 척의 배와 수천 명의 어민이 한꺼번에 출현할 정도였다. 활동범위도 제1기가 주로 황해도 연해지역이었던 것에 반해 제2기는 전라도와 충청도까지 확대되고 있다. 어업기간도 이전의 5~8월에서 제2기에는 정월~2월까지로 변화하고 있다. 또한 어민의 출신지도 이전의 山東, 遼東에서 江南을 비롯한 전 연해지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제1기와 제2기의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변화의 한 가운데에 ‘靑魚’가 있다. 제1기에 청 어민의 주된 어획대상은 海蔘이었던 것에 반해, 제2기는 청어였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청어는 山東 연해에서 대량으로 어획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청어는 산동에서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1850년대 이후에 청의 불법어민이 황해도뿐만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에서 대거 출현하는 것과 대체로 일치한다. 산동에서 조선으로 이동한 청어를 따라 청의 불법어민들도 서해안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비록 이후의 일이지만 1880년대를 기점으로 청어는 서해안에서 다시 동해안으로 이동하고 있다. 제3기와 제4기에는 청 어민들이 동해안에서도 발견된다. 청어의 이동을 따라 청 어민들이 동해안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청어라는 물고기가 제2기 동안 조선과 청 사이 어업분쟁의 보이지 않는 배경이었음을 보여준다.
제2기 동안 조선의 대응책은 제1기와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康熙 51년(1712)의 전례에 따라 연해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청이 해양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서 조선은 여전히 海禁令을 강화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청조는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 1882년 『조청무역장정』을 체결하면서 불법어업을 합법화했던 것이다. 다음해 조선과 일본 사이에도 章程이 체결되면서 조선 해양에서 청과 일본의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다.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조선과 일본 사이의 본격적인 어업분쟁은 1883년 이후부터였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청과의 어업분쟁은 일본과의 어업분쟁보다 훨씬 더 오래 되었을 뿐 만 아니라 장기적인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1883년 이전의 200여 년 동안 이미 조선과 청 사이의 중요한 외교문제가 되어 왔다. 일본의 어민들이 조선의 해양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이전에 이미 청의 어민들이 그 주도권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문제는 다음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다만, 전근대의 국제적 어업분쟁을 다루면서 지나치게 일본에 편중되어 바라보는 시각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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