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1690년대 후반, 조선은 ‘을병대기근(1695~1699)’이라는 참혹한 기근을 겪었다. 대기근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은 청에 곡물교역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강희제는 5만석의 곡물을 조선에 보냈다. 이런 사실은 우리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이 글은 소빙기의 관점에서, 강희제의 ‘해운진제’에 대한 조선의 한 반응으로 大報壇에 주목했다.
을병대기근 동안, 청으로부터 쌀을 들여오자는 ‘請穀’ 논의는 숙종 22년(1696)에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이듬해 기근이 더 심해지자 많은 논란 끝에 9월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조선의 요청을 받은 강희제는 신속하게 육로로 2만석, 해로로 3만석을 보냈다. 숙종 24년(1698) 정월에는 육운미 2만석이, 4월에는 해운미 3만석이 중강에 도착하여, 교역을 통해 조선에 배분되었다.
곡물이 들어오자 이를 둘러싼 문제들이 불거졌다. 이를 빌미로 ‘請穀’ 자체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를 계기로 업무를 총괄하던 최석정을 비롯하여 請穀을 주도했던 신료들에 대한 탄핵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강경한 사대부들은 복수설치의 대상인 ‘오랑캐’ 청으로부터 곡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들은 請穀을 ‘대명의리’와 ‘춘추대의’를 망각하고, 원수인 청으로부터 씻지 못할 치욕을 당했다고 여겼다. 그들에게 淸米를 받아먹는 것은 곧 夷狄, 禽獸가 되는 것이었다. 나아가 전후 수백만 백이 사망하는 대참상을 겪으면서, 일각에서는 이러한 역병이 ‘淸米’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숙종 30년(1704) 대보단을 둘러싼 논의는 을병대기근 동안의 기근과 여역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復讎雪恥’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인식을 담고 있다. 또한 을병대기근의 여파, 보다 구체적으로는 강희제의 ‘해운진제’에 대한 충격이 반영되어 있다. 이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최석정에 대한 공격에서이다.
명이 멸망한 갑신년(1644)으로부터 ‘一周甲’이 되던 해에 대보단이 설립되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치욕인 정축년(1637)의 ‘일주갑’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바로 청으로부터 곡물을 들여오자는 ‘請穀’논의가 있었다. 청미를 받아들이는 순간 ‘尊周義理’는 망각되었고, 夷狄과 禽獸가 되었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존주의리’와 ‘춘추대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장치가 필요했다. 청곡에 대해 가장 강경하게 비난했던 인물들이 송시열계의 강경노론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들은 만동묘와 대보단의 건립을 주도하면서, 사실상 이후 조선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장악했다. 대보단은 강희제의 해운진제에 대한 보다 분명한 조선의 대답이었던 것이다.
[맺음말]
1690년대 후반 조선은 ‘을병대기근(1695~1699)’이라는 참혹한 기근을 겪었다. 대기근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은 청에 곡물교역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강희제는 5만석의 곡물을 조선에 보냈다. 이것은 청이 건립된 이후 海運을 통한 최초의 국제원조였다. 이 글은 소빙기의 관점에서 강희제의 ‘해운진제’에 대한 조선의 한 반응으로 大報壇에 주목했다.
국내학계에서 을병대기근 동안에 있었던 강희제의 ‘海運賑濟’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이 復讐雪恥의 대상인 청으로부터 곡물을 들여왔던 것은 을병대기근이 그만큼 극심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경신대기근 때도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신료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을병대기근 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을병대기근 동안, 청으로부터 쌀을 들여오자는 ‘請穀’ 논의는 숙종 22년(1696) 이유에 의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이듬해 기근이 더 심해지자 박태순은 ‘중강개시’를 통해 곡물을 유입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른바 ‘請市’였다. 많은 논란 끝에 그해 9월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주목해야할 것은 ‘淸米’를 들여오는 것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청곡’에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숙종이었다.
조선의 ‘請穀’에 대한 강희제의 대응은 놀라웠다. 그는 신속하게 盛京에서 2만석의 쌀을 陸路로 운송하는 한편, 海路로 2만석의 쌀과 황제의 무상미 1만석을 보냈다. 숙종 24년(1698) 정월에는 육운미 2만석이, 4월에는 해운미 3만석이 중강에 도착하여 교역을 통해 조선에 배분되었다. 강희제가 이때의 득의를 표현한 것이 「海運賑濟朝鮮記」였다. 그렇지만 이것을 바라보는 조선의 시선은 전혀 달랐다.
곡물이 들어오자 이를 둘러싼 문제들이 불거졌고, 이를 빌미로 ‘請穀’ 자체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황제의 은혜를 들먹이며 국왕이 친히 감사를 표현할 것에 대한 요구, 가격을 둘러싼 실랑이, 대량의 은화를 소비해야 했던 점, 그리고 私商들이 가져온 私米와 물화의 거래를 둘러싼 대립 등이 갈등을 낳았다. 이들 업무를 총괄하던 최석정이 숙종에게 바친 이부시랑 陶岱의 名帖에 들어있던 ‘眷弟’라는 표현은 이러한 반발을 최절정에 다다르게 했다. 이를 계기로 請穀을 주도했던 신료들에 대한 탄핵이 강력히 제기되었다.
이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강경한 사대부들은 복수설치의 대상인 ‘오랑캐’ 청으로부터 곡물을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들은 請穀을 ‘대명의리’와 ‘춘추대의’를 망각하고, 원수인 청으로부터 씻지 못할 치욕을 당했다고 여겼다. 나아가 백이숙제가 ‘周粟’을 먹지 않은 것처럼, “의리로서 죽을 것이지 胡米를 먹을 수 없다”까지 했다. 그들에게 淸米를 받아먹는 것은 곧 夷狄, 禽獸가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경한 비난이 계속되면서 請市를 주관했던 관료들은 탄핵되었다.
청곡에 대한 반발은 가을개시의 중단으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곧바로 雪上加霜으로 여역이 치성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전후 수백만 백이 사망하는 대참상을 겪으면서, 일각에서는 이러한 역병이 ‘淸米’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들은 강희제의 ‘선의’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들여온 淸米는 경멸과 증오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숙종 30년(1704) 대보단을 둘러싼 논의는 을병대기근 동안의 기근과 여역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복수설치’가 불가능하다는 현실인식을 담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청의 중국지배가 안정되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을병대기근의 여파, 보다 구체적으로는 강희제의 ‘해운진제’에 대한 충격이 반영되어 있다. 이것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최석정에 대한 공격에서이다.
명이 멸망한 갑신년(1644)으로부터 ‘一周甲’이 되던 해에 대보단이 설립되었다면, 또 다른 치욕인 정축년(1637)의 ‘일주갑’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바로 청으로부터 곡물을 들여오자는 ‘請穀’논의가 있었다. 이것은 또 다른 치욕이었다. 청미를 받아들이는 순간 ‘尊周義理’는 망각되었고, 夷狄과 禽獸가 되었다는 논리이다. 따라서 ‘존주의리’와 ‘춘추대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장치가 필요했다. 청곡에 대해 가장 강경하게 비난했던 인물들이 송시열계의 강경노론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들은 만동묘와 대보단의 건립을 주도하면서, 사실상 이후 조선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장악했던 것이다.
을병대기근은 소빙기의 가장 한랭했던 한 시기에 발생했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극단적인 기근상황에서 ‘청곡’ 논의가 진행되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17세기 전반까지 조선은 청에 쌀을 보내는 ‘수출국’이었다. 그렇지만 후반에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일차적으로 위정자들이 책임을 져야하겠지만, 본원적으로 당시의 기후조건에서 농업생산만으로는 대단히 불리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국가의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교역’이 절실했다. 강희제의 국제원조도 본질적으로는 곡물의 ‘교역’이었다. 조선의 강경한 사대부들은 기근을 구제하기 위한 이러한 교역마저도 이념으로 재단했다. 따라서 대보단은 강희제의 해운진제에 대한 보다 분명한 조선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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