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초록]
소빙기 동안 한류성 어종인 청어는 동아시아 바다에 대거 출현하여, 동아시아 3국을 풍요롭게 했다. 소빙기라는 기후변동(天)은 해양환경(海)의 변화를 초래하여, 청어어업(人)이 크게 발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후가 다시 온난해지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기후의 온난화로 인한 청어의 이동은 조청어업분쟁의 발단이 되었다. 1850년을 전후하여 중국의 바다에서 청어가 사라져갔다. 청국어선들은 청어를 쫓아 바다를 건너 조선의 바다로 몰려들었다. 이로 인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는 심각한 국제적인 어업분쟁이 발생했던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청어를 둘러싼 어업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조청무역장정 제3조에 어업규정이 포함되었다. 청은 조선바다에서 자국어민들의 불법적인 청어어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을 아예 조청무역장정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1880년대부터 청어는 조선의 서해에서도 사라져갔다. 1890년대에는 남해에서도 ‘絶種’되었고, 1940년경에는 동해에서도 사라져갔다. 이런 현상은 중국에서도 벌어졌다. 1830년경부터 줄어들었던 청어는 20세기에는 “옛날에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물고기가 되었다. 일본도 1958년경에는 홋가이도에서 청어가 사라졌다. 지구적인 온난화는 소빙기가 가져온 ‘청어의 풍요로움’을 거두어들였던 것이다. 청어는 ‘천·해·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무언의 증언자’이다.
[맺음말]
마크 쿨란스키는 <대구, 세계를 바꾼 물고기의 일대기>라는 매력적인 책을 썼다. 대구라는 물고기가 세계사 곳곳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생생하게 밝힌 역작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은 있다. 역사의 전개에 영향을 주었던 대구도 지구적인 기후변동에 영향을 받아왔었다는 사실이다. 쿨란스키는 중세온난기, 소빙기, 그리고 온난기로 이어지는 기후변동의 역사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기후학자인 허버트 램이 지적했듯이, 대구는 지구적인 기후변동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었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으면 대구의 보다 풍부한 이야기를 충분히 묘사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른바, 천․해․인의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도 물고기가 역사에 영향을 끼친 일이 있을까? 청어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날 동아시아 바다에서 거의 사라진 청어는 ‘소빙기’ 동안 가장 풍족하게 잡히던 물고기였다. 17세기를 전후하여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바다에도 청어가 대거 몰려들어, 동아시아 3국은 청어어업이 크게 발전했다. 그 배경에는 소빙기라는 지구적인 기후변동이 있었다. “동해의 물고기가 서해로 이동했다”라는 당시의 인식은 이러한 해양환경의 변화를 대변한다. 그렇지만 소빙기가 끝나고 온난기로 접어들면서 양상은 전혀 달라졌다.
19세기 중후반부터 기후는 소빙기에서 온난기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기후변동은 해양환경에도 변화를 주었다. 청어의 이동은 이런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주목해야 할 것은 청어의 이동이 동아시아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던 점이다.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후변동으로 인한 청어의 이동은 조청어업분쟁의 발단이 되었다. 1850년대를 전후하여 중국의 바다에서 청어가 사라져 갔다. 청국어선들은 청어를 쫓아 바다를 건너 조선의 바다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청어를 강제로 매입했으며, 곳곳에서 약탈과 소요를 일으켰다. 청국어선의 불법어업과 행패를 막기 위해, 조선조정은 청나라에 불법어업을 금지하게 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국제적인 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사실, 17세기 후반부터 청국어선의 불법어업은 이미 심각했다. 그렇지만 1850년을 기점으로 그 성격은 전혀 달라졌다. 오로지 ‘청어’를 잡기위해 바다를 건넜던 것이다. 청어는 조청어업분쟁의 원인이었다.
둘째, 1882년 체결된 조청무역장정 제3조에 어업규정이 포함된 것은 청어 때문이었다. 본래 조청무역장정의 안건에는 어업규정이 없었다. 이것이 급작스럽게 제3조에 포함되었던 것은, 청국어선들의 불법어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 17세기 이후, 산동은 소빙기의 혜택으로 청어어업이 크게 발전했다. 19세기 중후반 청어가 중국바다에서 사라져가자, 청어어업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청어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의 바다로 몰려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이홍장은 조선의 바다에서 자국어민들의 불법어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을 아예 조청무역장정에 집어넣어버린 것이다. 제3조의 각주에서 산동의 바다에서 조선의 바다로 옮아간 물고기는 바로 청어였던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조청무역장정에 어업규정이 포함되자, 일본도 우리바다에서의 ‘通漁權’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 결과, 1883년 조일통상장정 제42관에 어업규정이 들어갔다. 이로써 경기도와 충청도를 제외한 모든 해역이 중국과 일본의 어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청어는 우리바다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침탈을 촉진하는 작용을 했다.
셋째, 온난화가 진행되면서 청어가 동아시아바다에서 사라지면서, 청어어업도 쇠퇴했다. 청국어선들의 불법적인 청어어업을 합법화하기 위해 조청무역장정 제3조에 어업조항을 포함시켰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1880년대에는 서해에서도 청어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청국어선들의 약탈과 소요는 더욱 격렬해졌다. 결국 그들은 청어를 대신하여 새우, 갈치 등 새로운 물고기를 어획했다. 서해에서 청어가 사라져갈 때, 남해에서도 청어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890년대에는 서해와 더불어 남해의 청어는 ‘절종’되다시피 했다. 1910년경에는 부산과 울산의 바다에서 청어가 사라지다가, 1940년경에는 동해에서도 청어가 사라져 갔다.
이런 현상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바다에서도 일어났다. 1830년경부터 줄어들었던 청어는 20세기에 들어서는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물고기가 되었다. 1897년 절정에 달했던 일본의 청어어획량은 갈수록 쇠락하여 1958년경에는 홋카이도에서도 청어가 사라졌다. 거대한 지구적인 기후변동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7세기 이후에 동아시아 3국은 모두 청어어업이 크게 발전했었다. ‘소빙기의 혜택’을 입었던 것이다. 19세기 중후반 온난화가 진행되면서 청어가 사라져가자 청어어업은 크게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적인 온난화는 소빙기가 가져온 ‘청어의 풍요로움’을 거두어 들였던 것이다. 동아시아 청어의 역사는 기후변동(天)이 해양환경(海)에 변화를 주고, 그것이 다시 인간의 역사(人)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다. 청어는 ‘천․해․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무언의 증언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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