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mate & History/[동아시아 소빙기 연구실](2013-14)

[2014] 명말청초의 황정과 왕조교체

블루트레인 2014. 11. 21. 22:35

 

 

 

 

[국문초록]

 

이 글은 소빙기의 관점에서, 황정(荒政)이 명청교체에 끼친 영향을 살폈다. 명청교체가 이루어진 17세기는 소빙기(Little Ice Age)’의 기후변동으로 인한 생태위기가 있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대응, 곧 국가의 황정은 왕조의 운명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명조의 멸망은 황정체제의 붕괴와 관련되어 있다. 만력연간은 재정악화와 황제의 정치적 게으름로 황정체제는 붕괴되었다. 숭정연간에는 재정악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재해와 기근에서도 오히려 백성들을 착취했다. 이것으로 농민반란은 더욱 확대되었고, 결국 명조는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청조는 정치적인 불안정 속에서도 황정을 중시했다. 강희제는 황정체제를 정비하고, 대규모의 세금감면을 통해 이민족지배를 안정시키고, ‘강건성세(康乾盛世)’의 기반을 다졌다.

 

명조의 가혹한 착취에 분노했던 강남의 지식인들은 강희제의 파격적인 세금감면을 경험하면서 청조를 정통왕조로 인정했다. 강희제의 통치기간을 문경지치(文景之治)’ 혹은 그를 요순’(堯舜)에 비유하기도 했다. 명조는 소빙기의 생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다. 하지만 청조에게 이것은 기회였다. 청조는 이런 위기를 효율적이고 파격적인 황정을 통해 잘 극복함으로써 강건성세라는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맺음말]

 

숭정 원년부터 섬서에서 번져갔던 기근을 계육기는, “하늘에서 奇荒을 내리니 이자성을 돕는 까닭이다라고 했다. 명조는 이자성에 의해 멸망했고, 이자성이 명조를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기황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명계북략?의 내용을 총정리하면서, “대도적은 대기근으로 말미암고, 人亂天變에 응한 것으로, 명조는 결국 이것으로 멸망했다고 단언했다. 명조의 멸망에 기근이 끼친 영향이 지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청초는 어떠했을까? 청초에도 재해와 기근은 명말에 못하지 않게 빈번했다. 그럼에도 청조는 이를 극복하고 강건성세의 번영을 이루었다. 무엇이 淸 兩朝의 운명을 엇갈리게 했을까? 이 글은 여기에 대한 한 대답으로 황정에 주목했다.

 

명청교체를 바라볼 때, 兩朝황정에 주목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명청교체가 이루어진 17세기는, ‘明淸小氷期’, 혹은 明淸宇宙期라고 일컬어지는 소빙기의 기후변동이 절정이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생태위기17세기 전반보다 후반이 더 극심했다. 따라서 명조가 재해와 기근 때문에 멸망했다면, 청조의 성공도 이것으로 설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황정의 중요성이 있다. 소빙기의 관점에서 국가의 재해와 기근에 대한 대응, 곧 황정은 양조의 운명을 가름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명조의 멸망은 명말의 극심했던 기근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당시 기근이 극심했던 것은 소빙기의 생태위기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국가의 황정이 붕괴되면서 재해에 대한 대응력을 상실하면서 기근은 더욱 커져갔다. 만력연간에 재정악화와 더불어 황제의 怠政이 겹치면서 황정은 폐기되다시피 했다. 숭정연간에는 기근이 더 심해지는 상황에서도 재정의 압박으로 황정을 제때 실시하지 못하였다. 더 큰 문제는 三餉加派로 상징되는 수탈이었다.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도적이 되고, 도적으로 인해 기근은 극심해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결국 숭정 13~15년의 대기근을 계기로 세력을 확대한 이자성의 농민반란군에 의해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만력이후 황정체제의 붕괴는 명조 멸망의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청조의 성공은 눈부셨다. 초기의 정치적 혼란에도 황정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순치제는 재정의 어려움에도 황정에 적극적이었다. 보고체제를 정비하고 신속하게 기근을 구제하려 했다. 강희제는 더욱 적극적이었다. 그는 재해에 대한 정보를 다양화하는 등 황정체제를 정비했다. ‘파격적인蠲免을 통해 황제의 은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 강희제는 積逋現徵 뿐만 아니라, 미래의 부세도 견면 했다. 때로는 재해 상황이 아님에도 미리 예측하여 견면을 실시했다. 황정체제의 정비와 파격적인 견면을 통해 강희제는 소빙기의 생태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강건성세의 기틀을 다졌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강남사회의 반응이다. 명청교체기에 강남은 反淸운동이 가장 심했던 곳이다. 그럼에도 양조의 황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상반되었다. 화북이 대기근과 농민반란으로 혼란에 빠졌을 때, 명조는 역시나 기근에 시달리던 강남을 수탈했다. 이에 백성들은 분노했다. “백성들은 이미 난을 생각하고,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떠나버린지경이었다. 강남의 지식인은 자신의 시대를 후한 桓帝의 치세에 비유하기도 했다. 명조가 존립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깊은 의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에 반해 청조의 황정에 대해서는 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청조의 건립 초반 강남에 대한 탄압정책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표명했던 지식인들은 강희제의 신속한 황정과 파격적인견면을 경험하면서 청조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었다. 강희제의 치세를 문경지치의 태평성세로 표현하고, 강희제를 요순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민족 국가인 청조를 자신들의 정통왕조로 인정했다. 강희제의 황정은 청조의 중국지배 기반을 확립하는 실질적인 계기가 되었다.

 

소빙기의 생태위기는 명말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청초에도 생태위기는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양조의 운명은 전혀 달랐다. 명조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다. 하지만 이민족 지배라는 어려움을 해결해야 했던 청조에게 소빙기의 생태위기기회였다. 청조는 이런 위기를 효율적이고 파격적인 황정을 통해 잘 극복함으로써 강건성세라는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시간의 집적(Sediments of Time)’이라는 매력적인 책제목처럼,안정은 하루 만에 안정되지 않고, 위기는 하루 만에 위태로워지지 않는다. 이 둘은 점차로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2차 한랭기의 관점에서 보면, 명조의 멸망과 청조의 성공에는 각각 60여 년의 소빙기의 생태위기가 주어졌다. 이에 대한 60년 동안 天時, 地利, 人和의 작은 집적들이 양조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