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제27회 기근과 카니발리즘: 1640~1642년의 대기근

블루트레인 2011. 12. 10. 11:46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27> 기근과 카니발리즘: 1640~1642년의 대기근
명 말, 가장 풍족했던 강남까지 인육 먹어

 

[국제신문] 2011년 11월 3일

 

 

16세기 초 주신(周臣)의 '유민도권(流民圖卷)'(부분·미국 호놀롤루 미술학원 소장).

 

 

"숭정 15년(1642)에서 16년, 연이어 크게 가물었다. 나무껍질과 풀뿌리는 벗겨지고 파헤쳐져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서쪽 성 안에서 인육을 발라내어 끼니를 채웠다. 시장의 장사치는 몰래 인육을 밀가루 빵으로 싸서 팔았다. 어떤 이는 인육을 절여서 노새나 말고기라고 속였다. 여러 사람이 성 밖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묶어서 죽이고 그것을 먹는 경우가 있었다. 또 어떤 아낙은 매일 저자거리에서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른다는 핑계로 유괴하여 죽여서 먹었다. 이때 산동 일대에는 민간에서 공공연히 가게를 열어 사람을 도살하여 인육을 팔았는데, 매 근에 8푼으로 쌀고기(米肉)라고 하는데도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절강 가흥부 출신의 왕포는 1640년과 1641년의 극심한 대기근을 서술한 이후 다음과 다다음해의 연이은 가뭄으로 강남에서 광범위하게 행해졌던 카니발리즘을 이렇게 묘사했다.명말 중국에서 카니발리즘은 결코 낯선 일이 아니었다. 숭정제가 즉위했던 1628년 이후 화북지역에는 가뭄과 기근이 없는 해가 없었다. 정부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반란으로 내몰렸다. 여기에 더하여 반란을 진압하러 온 군인들마저 굶주림에 벗어나지 못해 백성들을 약탈하고 살육했다. 1640년 하남의 경우, "1636년에서 1640년까지 5년 동안 가뭄과 메뚜기의 피해를 입고, 더하여 병사들과 도적들이 노략질하고, 전염병이 횡행하였다. 백성들이 병사들에 죽고, 도적들에 죽고, 굶주림과 추위에 죽고, 전염병에 죽어 백 명 중에 한 두 명도 살아남지 못했고 집들은 버려져 텅 비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먼저 초근목피를 먹고, 후에는 부모와 자식, 형과 동생,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잔인하게 잡아먹어 그 참혹함을 차마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더욱 극심한 대기근의 서막에 불과했다.

대기근의 절정은 1640년에서 1642년이었다. 3년 동안의 대기근은 역대의 어떤 기근보다 극심했다. 화북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가뭄, 메뚜기의 습격, 전염병이 양자강 이남의 광대한 남부지역까지 확대되면서 대기근은 전 중국적인 상황이 되었다. 그 참혹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강남의 카니발리즘이다. 명말 양자강 하류의 강남은 중국 경제의 최선진지역으로 재해와 기근이 들어도 식인 행위는 좀처럼 없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면 강남에서도 인육을 먹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642년 인육을 먹는 사건이 강남에서 최초로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이것을 산동에서 내려온 떠돌이 거지들의 소행으로 보아 이들을 추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강남 사람들이 카니발리즘에 동참하게 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들도 끝내 이웃 사람을 잡아먹게 되고, 시장에는 산동에서처럼 인육이 유통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의 한 지식인은 "인육을 먹는 일은 이전에 산동과 하남에서 있다고 들었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소주성 안팎에서 이런 일들이 왕왕 벌어지고 있다"고 회고했다.

 

모든 것이 기록적이었다. 몇 년 동안 비는 거의 내리지 않았고, 대규모의 메뚜기떼가 양자강을 넘어 강남을 습격했다. 굶주림으로 면역력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페스트가 퍼져 사람들은 대량으로 죽어갔다. "사람들이 전염병에 죽고, 굶주림에 죽고, 도적에게 죽는 것이 열 명에 팔 구 명이었다. 마을들은 쓸쓸하여 땅은 황폐해지고 집들은 훼손되어 거의 인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은 예로부터 볼 수 없었던 대기근이었다." 1640년대 초반의 대기근은 사실상 명이 건국된 이래 최대의 기근이었고 그 규모는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 당시 사람들은 알 수 없었겠지만, 명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이때의 대기근은 지구적인 기후변동의 일부분이었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