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제4회 브뤼헐, 소빙기를 그리다

블루트레인 2011. 12. 2. 00:33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4> 브뤼헐, 소빙기를 그리다
혹한의 겨울로 종교분쟁 시대상황 은유

 

[국제신문] 2011년 5월 5일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눈 속의 사냥꾼'. 1565년 작.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농부들의 발걸음은 지쳐있다. 허기진 사냥개와 앙상한 나무는 그들의 처진 어깨를 더욱 짓누르고, 잔뜩 찌푸린 하늘은 그림자마저 삼켜버렸다. 피터르 브뤼헐.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그가 그린 '눈 속의 사냥꾼'은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의 다른 화가들과 달리 브뤼헐은 더 넓은 원경 속에서 농민들의 일상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눈이다. 언덕을 내려오면 탁 트인 대지 위에 꽁꽁 얼어붙은 하얀 눈의 세상이 펼쳐진다. 들판은 눈으로 덮여 있고 빙판에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썰매를 지친다. 저 멀리에는 얼음산이 치솟아 있다. 월별 노동 연작의 하나인 이 그림은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겨울풍경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던 것이다.

'눈 속의 사냥꾼'이 그려진 해는 1565년. 브뤼헐은 왜 눈 내리는 풍경에 매료되었을까? 1564-65년의 겨울 때문이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한랭했다. 그가 이전까지 활동하던 안트베르펜 항구는 사람이 다닐 정도로 얼어붙었다. 영국 템즈 강도 단단히 결빙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은 매일 강 위에서 사격놀이를 즐겼다. 중국은 회수가 얼어 우마가 다녔으며, 남아열대인 광서성에서는 물고기가 동사했다. 1565년 봄에 강원도 삼척의 바닷물이 얼었다. 동해의 결빙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꼭 10년 전인 1554-55년 겨울 함경도 바다가 길게는 2㎞ 정도 얼어붙어 인마가 통행한 일이 있었다. 사관은 이것을 음사(陰邪)한 기운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행하던 문정왕후의 독단을 비판한 것이다. 이제 다시 바다가 얼었으니 그 놀라움을 짐작할 수 있겠다.

브뤼헐은 브뤼셀의 작업실에서 생애에 길이 남을 추운 겨울을 경험하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그러나 그 겨울은 평화롭고 낭만적인 풍경이 아니었다. 16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신교와 구교 사이에 격렬한 분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눈 속의 사냥꾼'이 그려진 다음 해, 칼뱅파는 카톨릭 교회의 성상을 파괴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스페인의 필리페 2세는 1567년 '철의 공작'으로 알려진 알바 공작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브뤼헐은 네덜란드가 처한 이러한 공포상황이 1564-65년에 겪었던 혹독한 겨울과 흡사하다고 느꼈던 듯하다.

그는 5편의 겨울풍경을 남겼다. '새덫이 있는 겨울풍경'은 '눈 속의 사냥꾼'과 같은 해에 그려졌는데, 얼핏 한가로워 보이는 화면 속에서도 세상을 향한 경계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1566년의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영아살해', 1567년의 '눈 속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모두 그리스도의 생애를 빗대어 네덜란드가 처한 엄혹한 현실을 매서운 겨울에 은유하고 있다. 브뤼헐이 1569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그가 말년에 겨울풍경에 얼마나 매료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종교 갈등이 심해지고 있던 시기에 조선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불교 중흥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성난 유생들이 회암사에 들어가 불상의 목을 자르고, 스님 보우가 제주도에 귀양 가서 죽음을 당했던 것이 1565년의 일이다. 유생들은 문정왕후의 불교정책을 반대하면서 음양이 절도를 잃어 동해가 결빙되었다고 비판했었다. 소빙기 혹한은 브뤼헐에게 부조리한 현실을 예술로 승화하는 데 영감을 주었고, 조선에서 유불사상투쟁의 한 빌미가 되었다.

 

이제 브뤼헐의 그림을 다시 보자. 평원이 끝나는 곳에 얼어붙은 항구가 있다. 브뤼헐이 눈 덮인 겨울풍경을 구상하고 있을 때, 항구 너머 저편 조선의 바다도 얼어붙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라. 그림을 보며 역사를 상상하는 즐거움이 커질 것이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