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 코끼리 '象'과 상상
코끼리, 기후를 상상케하다
기후변동이 심해지고 이와 연관된 대규모 자연재해가 이어지면서 기후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인류 역사 속에서 기후변동은 어떤 변화를 일으켰을까. 기후변동과 역사의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있는 김문기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의 새 연재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를 통해 접근해본다.
[국제신문] 2011년 4월 14일
"소의 몸뚱이, 나귀의 꼬리, 낙타의 무릎, 호랑이의 발굽을 하고, 짧은 털에 잿빛의 착해 보이는 외모와 서글픈 목소리를 지니고, 귀는 구름이 드리운 듯 눈은 초생달 같은." 무엇이 상상되시는지? 조선 정조 5년(1780) 열하행궁에 갔던 연암 박지원이 묘사한 코끼리 모습이다.
코끼리가 이 땅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태종 11년(1411). 일본의 쇼군 미나모토 요시미치가 보내온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 코끼리의 모습이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놀라움 자체였을 것이다. 그 이듬해 코끼리의 기이한 모습을 비웃던 한 관리가 밟혀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졸지에 살인자가 된 코끼리는 재판을 받고 전라도 순천의 장도로 귀양갔다. 코끼리에게 동물재판을 행한 것도 흥미롭지만, 상상 속에만 있던 코끼리를 직접 맞닥뜨렸을 당시 사람들의 당혹감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상상'이란 말은 코끼리와 직접 관련이 있다. '상상(想像)'이란 실제 경험하지 않는 현상이나 존재를 마음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지(像)'에는 코끼리(象)가 있다. 코끼리 형상을 마음으로 그려보는 것에서 상상은 시작된다. 왜 그럴까? 대답은 '한비자-해로'편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 있는 코끼리를 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에 죽은 코끼리뼈를 구하여 그 형태를 살펴서 그 살아 있는 코끼리의 모습을 생각해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경우에는 모두 그것을 '코끼리(象)'라고 했다."
한비(韓非)는 전국시대 말인 기원전 3세기 인물이다. 그의 시대에는 화북지역에서 더 이상 코끼리를 볼 수 없게 돼 사람들이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환언하면 그 이전 시대에는 코끼리가 풍부하게 있었다는 말이다. 고고학적 유물에 따르면 기원전 900년 이전에는 황하 중하류지역은 물론, 북경 부근에도 코끼리가 서식했다. 지금의 호북성·산동성 일부와 하남성 전체를 가리키는 예주(豫州)라는 지명은 한때 이 지역에 코끼리가 얼마나 풍부하게 서식했는지 상징한다. 그러나 기후가 한랭해지면서 코끼리 서식처는 점차 남하한다. 기후가 온난해졌을 때는 서식지가 일시적으로 북상하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 남쪽으로 계속 축소됐다. 현재 중국에서 코끼리는 남서지역 운남성에 일부 서식할 뿐이다.
이제 상상이라는 말의 의미는 더 분명해진다. 한비의 시대에는 기후변동으로 코끼리가 사라져버렸기에 '상상(想象)'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죽은 코끼리의 뼈밖에 없었다. 감각을 총동원해 뼈를 보고 만지면서 코끼리 본래 모습을 떠올리려 하는 것이 '상상'이었다. 이런 이유로 코끼리는 현재 눈앞에선 찾을 수 없는 미지의 이미지를 '상징(象徵)'하게 됐다. 모습 상(像), 미리 예(豫) 같은 글자에 '코끼리(象)'가 들어있는 이유다.
태종 12년(1412) 순천 장도로 귀양갔던 코끼리의 기구한 이야기는 세종 3년(1421)까지 계속된다. 이후 이 땅에서 코끼리를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코끼리는 다시 상상의 세계로 남겨진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는 코끼리를 어떻게 상상했을까? 그 단서는 제사에 사용됐던 상준(象樽·코끼리 술잔)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래사진을 보자. 설명이 없다면 이를 코끼리로 생각할 수 있을까? 이야말로 조선인들의 '상상(想象)'이다.
17세기 조선 백자철화상준제기(白磁鐵畵象樽祭器). 경기도박물관 소장
선사시대 이 땅에도 코끼리와 코뿔소가 살았다. 당시 한반도 기후가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했음을 보여준다. 기후변동은 코끼리를 상상하게 했지만, 이제 코끼리는 기후를 상상하게 한다. 상상은 인간을 꿈꾸게 했다. 그래서 상상하는 역사는 즐겁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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