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mate & History/[동아시아 소빙기 연구실](2010-12)

[2012]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기근과 국제적 곡물유통

블루트레인 2014. 11. 22. 02:28





[국문제요]


전쟁과 교역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 동안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곡물의 교역이 활발했다. 전근대시대에 국가와 국가 사이의 곡물유통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다. 곡물교역 논의가 심각하게 진행되었던 것은 대기근의 시기와 일치한다. 이런 사실은 중국과 조선의 곡물유통이 소빙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곡물 유통의 관계망은 변화했다.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계갑대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은 중강개시를 열어 명의 곡물을 유입했다. 여진이 성장하자 조선은 여진에 일방적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1644년 청이 북경을 점령했을 때 조선은 막대한 곡물을 운송하여 청의 안정적 통치에 일조했다. 청이 강남을 점령한 이후에는 더 이상 조선의 곡물을 요구하지 않았다.

17세기 후반 조선은 경신대기근(1670~1671)과 을병대기근(1695~1699)을 겪었다. 경신대기근 동안 조선은 절대적인 곡물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청에 곡물을 요청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을병대기근 때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청은 총 5만 석의 곡물을 보내 교역하게 함으로써 조선의 기근을 해결하게 했다. 청에 대한 復讐雪恥를 꿈꾸고 있던 조선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17세기 전반 중국이 극심한 기근을 경험하면서 명청교체가 이루어졌다. 이에 반해 조선은 청에 곡물을 공급하는 등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다. 그렇지만 17세기 후반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조선은 1백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기근을 두 차례나 겪었다. 이에 반해 청은 경제적 안정을 통해 조선에 대량의 곡물을 공급했다. 소빙기에 대한 중국과 조선의 적응이 서로 상반되었던 것이다  




[맺음말]


동아시아에서 소빙기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글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전근대 동아시아세계에서 국가와 국가 사이에 곡물교역을 통한 기근의 賑濟는 흔치 않은 사건이다. 그런 점에서 16세기말에서 17세기 동안 중국과 조선의 곡물교역은 흥미롭다. 왜 이 시기에 이런 현상이 있었을까? 이것은 소빙기와 밀접한 관련 있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 시기는 소빙기의 기후현상이 가장 현저했던 시기이자 동시에 기근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였다. 조선에서 중국과 곡물교역이 심각하게 논의 되는 것은 극렬한 대기근의 때와 일치한다. 임진왜란 중에 발생한 계갑대기근, 정묘호란을 전후한 시기의 병정대기근, 명청교체를 불러온 숭정 13~15년의 대기근, 현종대의 경신대기근, 숙종대의 을병대기근은 극단적인 대기근으로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곡물의 수입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시기였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곡물교역의 관계망은 변화했다. 계갑대기근 동안 중강개시를 통해 조선은 명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그렇지만 여진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강성해가자 조선은 여진에 일방적으로 곡물을 공급하는 위치로 바뀌었다. 1622년 이후 가도에 근거한 모문룡 군대에도 막대한 양의 곡물을 공급해야 했다. 청의 入關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의 곡물은 청이 성장하고 안정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이 강남을 점령한 이후 곡물공급지로서 조선의 역할을 사실상 사라지고 있는 것은 이런 사실을 반영한다.

곡물교역은 17세기에 발전한 개시무역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강개시는 계갑대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곡물교역이 필요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유성룡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사대부들은 교역이 荒政의 일부분임을 깨닫게 되었고, 나아가 開市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1628년의 사례처럼 곡물교역으로 기근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점은 소빙기와 국제무역의 관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소빙기라고 하면 농업생산력 하락, 경기 침체로 연결되기 때문에 국제무역의 발전과는 짐짓 모순되게 여겨졌다. 그렇지만 생산력 저하로 인한 열악한 조건들은 오히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교환을 더욱 촉진하는 면이 있다. 이런 점에서 소빙기는 17세기 동안 국제무역을 발전시키는 한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곡물교역에서 조선이 명과 청에 보이는 태도는 극명하다. 계갑대기근 때 중강개시를 통해 기근을 구제했던 것은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은혜였다. 그렇기에 1619년과 1628년의 기근 때는 조선이 보다 적극적으로 명과 곡물교역을 추진했다. 이에 반해 청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보였다. 경신대기근 때 끝내 곡물교역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은혜를 입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을병대기근 때 어쩔 수 없이 곡물을 들여왔지만, 그것은 곧바로 커다란 분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의 17세기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국가 간의 곡물교역은 그 자체로 기근에 대한 대응력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은 17세기 전반에 있었던 숭정 13~15년의 대기근을 겪으면서 명청교체가 이루어졌다. 명은 끊임없는 기근에 시달리면서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이를 이은 청은 이민족 지배라는 불리함을 딛고 康建盛世의 길을 열었다. 17세기 후반의 기후가 전반보다 훨씬 나빴던 점을 생각해볼 때 이것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은 17세기 전반 청에 대량의 곡물을 제공하는 등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지만, 17세기 후반은 1백 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기근을 두 차례 겪었다. 특히 을병대기근 때는 꺼려왔던 청으로부터 곡물을 제공받아야 했다. 이런 면에서 강희제의 海運賑濟17세기 소빙기의 기근에 대해 청이 성공적으로 적응한 반면, 조선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런 결론은 다소 단면적이고 거친 부분이 있다.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한반도의 기후대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날 한반도는 온대지역에 속한다. 이에 반해 중국은 온대지역 외에도 회수 이남으로 아열대와 열대지역까지 포괄하고 있다. 명청시대 중국의 농업생산력을 華中지역이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온대인 華北지역이 잦은 기근에 시달릴 때, 아열대인 화중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곡물이 긴급하게 수송되어 기근을 구제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소빙기의 관점에서, 기온이 하강할 때 아열대보다 온대지역이 농업생산에 훨씬 불리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이런 사실은 17세기 후반 조선이 대기근을 겪게 되었을 때, 중국보다 훨씬 불리한 한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문제는 앞으로 보다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