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mate & History/[동아시아 소빙기 연구실](2010-12)

[2012] 17세기 중국과 조선의 재해와 기근

블루트레인 2014. 11. 22. 02:17






[논문제요]


이 글에서는 소빙기라는 지구적인 생태환경의 위기17세기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을 재해와 기근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다음 몇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3국의 재해와 기근은 소빙기 기후변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7세기 동안 동아시아에는 빈번한 재해와 기근이 있었다. 이들 재해가 모두 소빙기 기후변동 때문에 초래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주요한 기근들이 대부분 소빙기 기후현상이 현저했을 때 동시적으로 발생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3국의 기근 사이에 일정한 동시성이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동시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소빙기의 이상저온과 변덕스러운 기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에 재해와 기근이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임진왜란 직후 발생한 癸甲飢饉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丁卯胡亂은 후금의 기근 상황이 전쟁을 일으킨 주된 원인 중의 하나였다. 丙子胡亂이 발생했을 때도 후금의 식량사정은 좋지 못했다. 명조를 멸망시킨 농민반란군은 1620년대 후반부터의 극심한 가뭄과 이상저온현상에서 시작되어, 이것이 절정에 달했을 때 획기적인 반전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아가 기근으로 인한 물자교환의 필요성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開市貿易倭館貿易과 더불어 조선후기 상품경제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기근이 동아시아의 전쟁과 교역에 보이지 않는 한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명의 멸망과 청의 성공은 기근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 명이 명말의 극심한 기근을 해결하지 못해 멸망한 것과 달리 청은 기근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음에도 효과적인 救荒政策으로 이민족이라는 한계를 딛고 중국지배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康乾盛世는 소빙기에 대한 청조의 성공적인 대응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청조의 이런 성공은 기후가 결코 역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 인간의 대응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소빙기의 기근을 극복해가는 동아시아 3국의 대응력이 엇갈리고 있다. 중국은 1640년대 초반의 대기근을 겪으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결국 명청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조선과 일본에서 극심한 기근을 겪고 있던 1670년대는 오히려 안정되어 가고, 1690년대 중후반에는 조선을 국제 원조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기근을 극복하고 있다. 이에 반해 조선은 1640년대 초반에는 적게 충격을 받았지만 17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기근은 극심해진다. 이것은 조선이 17세기 생태학적의 위기극복에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맺음말]


연구에 따르면 17세기 동아시아는 현재보다 1.5~2정도 낮았다. 아열대의 강과 호수, 때론 바다가 얼어붙었으며 감귤, 여지를 비롯한 과수들도 자주 동사했다. 여름은 서늘하였고 때론 눈과 서리가 내려 작물들의 성장을 방해했다. 17세기는 거대한 생태환경의 변화를 초래했던 시기였다. 그것은 지구적인 생태환경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소빙기라는 지구적인 생태환경의 위기17세기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을 재해와 기근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다음 몇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3국의 재해와 기근은 소빙기 기후변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17세기 동안 동아시아에는 빈번한 재해와 기근이 있었다. 이들 재해가 모두 소빙기 기후변동 때문에 초래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주요한 기근들이 대부분 소빙기 기후현상이 현저했을 때 동시적으로 발생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3국의 기근 사이에 일정한 동시성이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동시성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소빙기의 이상저온과 변덕스러운 기후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에 재해와 기근이 미친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임진왜란 직후 발생한 癸甲大飢饉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정묘호란은 후금의 기근 상황이 전쟁을 일으킨 주된 원인 중의 하나였다.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도 후금의 식량사정은 좋지 못했다. 후금의 초기 성장과정이 내부적인 양식부족에 따른 약탈경제의 성격을 띠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명조를 멸망시킨 농민반란군은 1620년대 후반부터의 극심한 가뭄과 이상저온현상에서 시작되어, 이것이 절정에 달했을 때 획기적인 반전을 일으킬 수 있었다. 나아가 기근으로 인한 물자교환의 필요성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開市무역은 倭館무역과 더불어 조선후기 상품경제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기근이 동아시아의 전쟁과 교역에 보이지 않는 한 힘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명의 멸망과 청의 성공은 기근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 명이 명말의 극심한 기근을 해결하지 못해 멸망한 것과 달리 청은 기근이 더욱 빈번하게 발생했음에도 효과적인 구황정책으로 이민족이라는 한계를 딛고 중국지배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다. ‘康乾盛世는 소빙기에 대한 청조의 성공적인 대응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청조의 이런 성공은 기후가 결코 역사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 인간의 대응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소빙기의 기근을 극복해가는 동아시아 3국의 운명이 달라지고 있다. 중국은 1640년대 초반의 대기근을 겪으면서 가장 큰 피해를 입고 결국 명청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렇지만 조선과 일본에서 극심한 기근을 겪고 있던 1670년대는 오히려 안정되어 가고, 1690년대 중후반에는 조선을 국제 원조할 정도로 성공적으로 기근을 극복하고 있다. 이에 반해 조선은 1640년대 초반에는 적게 충격을 받았지만 17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기근은 극심해진다. 이것은 조선이 17세기 생태학적의 위기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명말 숭정 13~15년의 대기근을 경험하면서 적극적으로 구황활동을 벌였던 陳龍正은 당시의 대기근이 天災의 유행에서 시작되어, 人事失策이 이어지면서 이루어졌으며”, “흉작을 당하는 것은 天運이지만 한 번 기근이 들고, 다시 또 기근이 것은 人事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이 글의 주된 관심이 소빙기 기후변동이 기근에 미친 영향이었기에, 기후적인 배경을 설명하는데 많은 것을 할애했다. 그렇다고 기근의 원인이 오로지 기후변동에 있다는 것은 아니다. 기후변동은 기근의 주요한 배경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기근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기근은 농업생산에서 국가의 곡물유통체제에 이르기까지의 사회적, 국가적 분배시스템의 문제이며 그런 면에서는 人事의 영역이다. 이 글은 소빙기 기후변동이라는 天災의 관점에서 17세기 동아시아의 기근을 거시적으로 훑어보았다. 이런 점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문제제기에 가깝다. 앞으로 연구에서 동아시아 3국의 기근에 대한 사회국가적 대응시스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분석과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