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제18회 이자성과 마오쩌둥, 기근이 돕다

블루트레인 2011. 12. 10. 03:12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8> 이자성과 마오쩌둥, 기근이 돕다
황토고원·연안 지역, 中 혁명근거지인 이유

 

[국제신문] 2011년 8월 18일

 

 

이자성(오른쪽 털모자 쓴 인물) 북경 입성도. 깃발에 쓰인 틈(闖) 자는 용맹을 상징하는 말로 농민반란 지도자 고영상의 별명이었는데 그가 죽자 이자성이 이어받았다.

 

 

1935년 10월 끝없는 행군과 전투에 지친 한 무리의 군사들이 중국 서북부의 외진 곳을 찾아들었다. 지난 1년 동안 그들은 '정부군'에 쫓겨 1만여㎞의 대장정에 올랐었다. 마침내 그들이 안착한 곳은 섬서성의 연안. 대장정에 올랐던 8만7000여 명 중 생존자는 6000여 명에 불과한 처참한 패배의 길이었지만, 그들은 그것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장정을 통해 확고한 지배력을 확보한 마오쩌둥은 바로 그곳 연안의 오랜 역사에 주목했다. 바로 이자성이다.

섬서성 북부지역은 황토고원의 메마르고 척박한 곳이다. 한 해의 농사와 생존을 오로지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지하는 땅. 그렇기에 사람들은 순박하지만 거칠었다. 명말 농민반란의 두 중심축인 이자성과 장헌충이 모두 이곳에서 나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대부분의 초기 농민반란지도자들과 달리 역졸(驛卒)과 군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관록(官祿)'을 먹었던 자들이다.

이자성은 섬서성 연안부 미지현 출신으로 한때 역졸이었다. 역졸은 정부의 공식적인 통신, 교통, 운수체제인 역참(驛站)에 근무하는 노동자이다. 명말, 후금과의 전쟁에 막대한 전비가 소요되자 국가재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농민반란이 급속도로 확대되던 1629년, 명조는 역참의 인원을 6할이나 감축했다. 생계수단을 잃은 역졸들은 도적이 되었다. 이자성이 농민반란에 참여한 것이 바로 이듬해부터였다.

연안부 연안 출신 장헌충의 경력은 더욱 이채롭다. 그는 섬서성 북부 국경을 지키는 군인이었다. 후금과의 전쟁에 군비가 집중되자 그곳 변방 군인들에게는 급료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장헌충도 다른 군인들처럼 소요를 일으키고 반란의 길에 들어섰다. 명조의 재정악화가 역졸이나 군인마저 도적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재정이 극도로 궁핍한 상태에서 연이은 기근이 불러오는 영향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1620년대 중반이후 계속적인 가뭄에 섬서성 북부지역은 속수무책이었다. 굶주린 사람들이 인육을 먹기에 이르렀지만, 구제는 고사하고 군비마련을 위해 가혹하게 수탈했다.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군대를 양성하려 하지만, 오히려 백성들을 내몰아 도적을 만드는" 상황이었다. 이들 기민들이 도적집단에 합류함으로써 대규모의 반란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전쟁, 재정악화, 농민반란, 기근은 서로 연계되어 명말의 정국을 혼란으로 내몰았다. '명계북략'을 저술한 계육기는 기근과 농민반란의 상관관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기근이 명조의 멸망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하늘이 재해를 내리는 것은 이자성을 돕기 위해서였다."

이자성은 1636년 반란군 우두머리 고영상이 살해당하자, 그 뒤를 이어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반란을 일으킨 뒤 14년 만에 북경 자금성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산해관을 넘어온 청군이 공격해오자 도망쳐야했다. 그가 자금성을 차지했던 것은 단지 41일뿐. 절반의 성공이었다.

 

300년 뒤 마오쩌둥은 이자성의 실패원인을 철저히 분석했다. 무엇보다 이자성의 유구주의(流寇主義), 곧 하나의 도시를 점령하면 그곳을 약탈하고는 곧바로 다른 도시를 공격해가는 방식을 경계했다. 그는 강고한 근거지를 세우고자 했고, 그것이 연안이었다. 마오쩌둥의 성공은 연안이라는 지역과 떼려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곳 사람들은 기질적으로 중앙정부에 반항적이었다. 300년 전 황토고원의 농민들이 명조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중국혁명 과정에서 연안의 역할이 새롭지만은 않다. 마오쩌둥은 연안에 '혁명근거지'를 세운지 12년 만에 자금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자성보다 2년을 단축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완전한 성공이었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