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문] 소빙기의 성찬, 근세 동아시아의 청어어업
청어, 소빙기(17~18세기) 백성 배 채운 '바다 선물'
[국제신문] 2015년 2월 18일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50218.22015173305
- 동아시아 기온 낮아 농업 침체
- 청어 어획량 급증 굶주림 면해
- 어업분쟁…일본인 북해도 진출
[1830년대 일본 박물학자 모리 바이엔의 '매원어보'에 실린 청어 그림]
청어(靑魚·herring)라는 물고기가 있다. 겨울철 별미 과메기의 재료인데, 꽁치로 대체된 지 오래다. 최근 이따금 청어 어획량이 늘면 이를 과메기 재료로 쓰기도 하지만, 예전만 못한 것은 사실이다. 20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보다 앞서 한류성 어종인 청어가 한국과 중국, 일본 등 근세 동아시아 국가 경제를 들었다 놨다 했다고 한다.
최근 수년간 소빙기라는 전 지구적 기후변동이 끼친 영향을 청어라는 물고기를 통해 추적해온 부경대 김문기(사학과) 교수가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지난 12일 효원사학회 기획학술발표회 때 발표한 '소빙기의 성찬(盛饌):근세 동아시아의 청어어업'이 그것. 김 교수는 근세 동아시아 3국에서 청어 어업이 발전했던 것은 소빙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파악했다. 이 시기 청어가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조선 후기와 일본의 상품화폐 경제 발전에도 청어가 크게 이바지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16세기 중반 스웨덴의 청어 어업 그림. 청어가 얼마나 많이 몰려드는지, 그물채로 뜰 정도다]
소빙기(小氷期)는 비교적 추운 기후가 지속하던 시기. 전 세계적으로는 13세기 초부터 17세기 후반까지를 의미하는데, 동아시아는 17세기 무렵에 두드러졌다. 이 시기 기온저하 현상은 농업 생산력 저하를 불러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이때 청어라는 '구원투수'가 등장한다. 청어가 동아시아 바다에 몰려들면서 한·중·일 3국 어민을 '풍성'하게 했다. 소빙기가 준 역설이자 선물이었다.
동아시아 3국 중 청어 어업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은 우리나라였다. 고려 말 이색(李穡·1328~1396)의 시에도 청어가 등장한다. 조선 세종 14년(1432)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함경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에 청어가 풍부하게 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구, 조기와 달리 청어는 동해, 남해, 서해 전 해역에서 났다. 임진왜란의 전란과 기근을 겪어 국가 재정이 고갈되자 선조 36년(1603) 조정은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에서 청어가 많이 나므로 청어세(靑魚稅)를 거두자며 건의했다. 물론 17세기 후반 유형원(柳馨遠·1622~1673)이 청어세 등 어염세의 과중한 수탈을 지적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지만, 청어가 극심한 풍흉 속에서도 조선 백성의 배를 불리고 있었다.
[류성룡의 '징비록'.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기 전 조짐의 하나로
해주의 청어가 중국 요동으로 이동한 것을 밝히고 있다]
청어의 성찬을 즐긴 것은 조선만이 아니었다. 17세기 후반 중국 산동, 요동 연해에서 청어 어업이 크게 발전했다. 소빙기의 한랭화 현상으로 기근이 극심하던 17세기 후반 중국 산동 연해민은 청어 덕분에 굶주림을 면했다. 청어는 산동 언해민의 도서 개발에도 직접적인 촉매제가 됐다. 19세기 후반에는 청어를 놓고 서해에서 조선과 청나라 간 어업분쟁이 빚어지기까지 했다.
일본은 17세기까지 북해도(홋카이도) 중심의 청어 어업이 일본의 경제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그러나 18세기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1730년대에는 북해도 청어 어업이 농업을 대체할 정도였다. 당시 정어리로 만든 비료가 부족해 가격이 치솟자 이에 대응해 청어로 만든 비료가 급속도로 유통된 데 따른 것이다. 이는 결국, 본토 일본인의 약탈적인 북해도 진출로 이어졌다. 원주민 아이누 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과정에 극심한 기근이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청어를 통한 중국 산동의 기근 탈출구 모색과 닮은꼴이다.
[국제신문] 오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