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트레인 2011. 12. 2. 00:25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3> 소빙기, 조선을 지배하다
지난 1만년간 가장 추웠던 17세기, 대기근·전쟁 등 환란 원인 되기도

 

[국제신문] 2011년 4월 28일

 

 

1640년께 그린델발트 빙하의 확장 

 

 

1644년 6월 몽블랑이 올려다 보이는 샤모니에서는 특이한 의식이 행해졌다. 주민들의 요청으로 이곳을 찾은 주교는 300여 명의 주민을 이끌고 마을을 덮쳐오는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빙하로 행진했다. 빙하 앞에서 예배를 올리면서 주교는 빙하가 더 내려오지 않도록 신의 가호를 빌었다. 1630년이 되었을 때 샤모니는 밀려오는 빙하로 이미 토지의 3분의 1을 잃었다. 1640년에 접어들면서 빙하의 확장은 더욱 빨라져 마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주민들에게 이것은 공포였다. 신의 징벌이라고 생각한 그들이 마지막으로 매달린 것은 주교에게 탄원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 허목은 지리산에 올랐다. 1640년 10월 천왕봉에 오른 그는 정상이 너무 추워 나무가 자라지 않고 음력 8월에도 겨울처럼 눈이 내린다고 했다. 허목보다 177년 전에 지리산을 유람했던 이륙의 기록은 더욱 선명하다. "벼랑과 골짜기 사이에는 여름이 지나도록 얼음과 눈이 녹지 않는다. 음력 6월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고, 7월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8월에는 크게 얼어붙는다. 초겨울에는 폭설이 내려 계곡이 모두 평평해져 사람들이 왕래할 수가 없다."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알프스 빙하가 마을을 덮쳐오고, 여름에도 지리산 골짜기에 눈과 얼음이 가득 찬 풍경.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시 기후가 현재보다 훨씬 추웠다는 것이다. 빙하의 확장은 지구적인 현상으로 대체로 1300년에서 1850년까지 계속됐다. 기후학자들은 중세온난기 이후 급격하게 한랭했던 이 기간을 작은 빙하기라는 의미에서 '소빙기(Little Ice Age)'라 했다. 중국은 명청시대를 아우르기 때문에 수당온난기와 대비해 명청소빙기라 부른다. 우리는 조선시대 전체가 소빙기였다.

중국과 조선의 기록을 검토하면 15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후반까지 극심한 한랭화 현상이 있었다. 유럽은 템스강 네덜란드운하를 비롯하여 강과 호수가 자주 얼어붙었고, 북해와 지중해의 바다도 결빙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중국도 회수 동정호 등 아열대지역의 강과 호수, 때로는 바다마저 얼어붙는 일이 잦았다. 이런 한랭화로 중세온난기 동안 확장되었던 포도재배지역이 축소됐다. 중국은 열대작물인 감귤, 여지, 빈랑 등의 과수뿐 아니라 아열대지역 호수의 물고기가 얼어 죽는 일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이상저온으로 작물의 생장기간이 짧아져서 농업생산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기근이 잦았다.

그 중 17세기는 지난 1만 년 동안 가장 추웠던 시기라 할 정도로 극히 한랭했다. 세계적으로 기근, 역병, 폭동, 반란, 전쟁, 정권교체 등의 격변이 끊이지 않았다. 중국은 명청교체가 이루어졌고, 일본은 에도막부가 들어섰다. 조선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으며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기근이 두 차례나 있었다. 북벌, 예송논쟁, 대동법, 상평통보, 당쟁과 환국 등은 소빙기 기후현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17세기 위기'라는 말은 소빙기라는 기후변동이 인류의 생존에 극심한 위기를 초래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면서 중세온난기는 물론이고 소빙기의 기억도 잊혀졌다. IPCC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보고서는 현재의 온난화가 인류역사상 최대의 위기라고 말한다. 빙하의 확장을 두려워했던 사람들은 이제 빙하가 줄어드는 것을 종말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기후변동은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요구해 왔다. 그런 면에서는 위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를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생각해보라. 샤모니 주민들은 그들의 기도가 마침내 이뤄졌다고 여기지 않을까?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