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7세기 강남의 재해와 민간신앙: 유맹장신앙의 전변을 중심으로
[국문제요]
본고는 대표적인 驅蝗神인 劉猛將信仰을 중심으로 17세기 江南의 災害와 民間信仰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劉猛將이 처음부터 驅蝗神으로 출발했던 것은 아니다. 劉猛將은 본래 殉難과 戰爭의 신이었다. 16세기 후반부터 ‘驅蝗’의 神力을 갖추기 시작하여, 17세기 전반에는 완전한 驅蝗神으로 변모하였다. 劉猛將의 이러한 변화는 17세기를 전후해 江南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蝗災의 위협 때문이었다. 劉猛將의 이러한 변모에 따라 기존의 ‘劉銳說’이 도전 받았다. 劉銳는 殉難․戰爭의 神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驅蝗의 神力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明末淸初 災害로 인한 民間信仰의 極盛은 당시 발달하고 있던 商品經濟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과정에 無賴棍徒들이 깊숙이 관여 경제적 이익을 탈취하였다. 康熙 23년(1684) 江南巡撫 湯斌이 강남의 풍속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과정에서 淫祠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은 민간신앙의 이러한 구조 때문이었다.
셋째, 驅蝗神으로서 劉猛將信仰은 湯斌의 淫祠彈壓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강남의 가장 대표적인 민간신앙이었던 五通神이 湯斌에 의해 正祠에서 淫祠로 규정되어 다시 신원회복을 하지 못한 반면에 劉猛將은 옹정제에 의해 祀典에 편입됨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正祠로 편입되었다. 이를 계기로 江南의 劉猛將은 전국적인 民間信仰으로 발전했다. 17세기 전후의 蝗災를 계기로 殉難과 戰爭의 신에서 驅蝗神으로 변모했던 劉猛將은 蝗災에 대한 자신의 神力으로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넷째, 劉猛將에 대한 國家勸力의 태도는 시기별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明末에는 官의 民間信仰에 대한 태도가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崇禎 16년(1643)에는 劉猛將을 비롯한 여러 신들이 모인 광란의 賽會에 대해서 官은 방관하고 오히려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劉猛將은 아직 淫祠였음에도 불구하고 巡撫와 知縣이 여러 차례 致祭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康熙 20년대 초반에 이르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湯斌에 의해 五通神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淫祠로 규정되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雍正 연간에는 다시 변화가 나타난다. 雍正帝는 湯斌에 의해 淫祠로 규정된 劉猛將을 祀典에 편입시킨다. 國家勸力에 의해 劉猛將은 淫祠에서 正祠로 바뀌게 된 것이다.
劉猛將에 대한 國家勸力의 태도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明末에는 崇禎 14년을 전후한 극심한 기근 상황 속에서 행정당국의 구제능력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리적 공포의 배출구인 민간신앙에 대해서 억압적인 태도를 취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康熙 20년대 초반의 경우, 오랜 내란이 종식되면서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자, 오랫동안 방기되었던 民間信仰에 대해서 본격적인 통제를 가하고 있다. 40여 년 후 雍正帝는 지방의 민간신앙 중에서 국가의 체제유지에 유리한 것을 선별하여 국가제사체제에 편입시켜서 國家權力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있다. 劉猛將은 驅蝗이라는 荒政에서의 탁월한 능력으로 인해 옹정제의 선택을 받았던 것이다. 종합하면 明末에는 放棄 혹은 寬容의 방법을, 湯斌의 경우는 彈壓과 排除의 방법을, 雍正帝는 수용의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맺음말]
본고는 대표적인 驅蝗神인 劉猛將信仰을 중심으로 17세기 江南의 災害와 民間信仰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17세기 강남은 세계적 小氷期 기후의 영향으로 水災, 旱災, 蝗災, 冷害, 蟲災, 疫疾 등 다양한 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명청교체라는 격변과 맞물려, 이러한 재해는 당시 사람들의 심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재해로 인한 심리적 불안과 공포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관심과 광란의 숭배를 불러일으켰다. 본고에서 劉猛將을 중심으로 명말청초 강남의 민간신앙에 대한 분석에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까지 연구에서 ‘劉猛將=驅蝗神’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劉猛將이 처음부터 驅蝗神으로 출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劉猛將은 본래 유예 殉難과 戰爭의 신이었다. 16세기 후반부터 ‘驅蝗’의 神力을 갖추기 시작하여, 17세기 전반에는 완전한 驅蝗神으로 변모하였다. 劉猛將의 이러한 변화는 17세기를 전후해 江南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蝗災의 위협 때문이었다. 소빙기의 시작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습윤한 기후에서 건조한 기후로 변화함에 따라 이전까지 주로 화북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蝗災가 강남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고, 이에 대한 민간신앙에서의 대응이 劉猛將=驅蝗神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劉猛將의 이러한 변모에 따라 기존의 ‘劉銳說’이 도전 받았다. 劉銳는 殉難․戰爭의 神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驅蝗의 神力을 정당화시켜줄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明末淸初 災害로 인한 民間信仰의 極盛은 당시 발달하고 있던 商品經濟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재해가 발생하면 심리적 불안으로 인해 사람들은 쉽게 신을 찾았다. 이를 빌미로 돈을 염출하여 연극을 상연하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광란의 행사를 개최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다양한 상업행위가 행해졌다. 이 과정에 無賴棍徒들이 깊숙이 관여 경제적 이익을 탈취하였다. 강희 23년(1684) 강남의 순무로 부임한 湯斌이 강남의 풍속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과정에서 淫祠가 주된 탄압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민간신앙의 이러한 구조 때문이었다. 재해에 대한 심리적 불안과 공포마저 상업 시스템에 흡수되었던 것이다.
셋째, 驅蝗神으로서 劉猛將信仰은 湯斌의 淫祠彈壓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강남의 가장 대표적인 민간신앙이었던 五通神은 湯斌에 의해 正祠에서 淫祠로 규정되어 다시 신원회복을 하지 못했다. 반면에 劉猛將은 湯斌의 탄압 이후에도 일정한 지지를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을 화북지역까지 확대하고 있었다. 이후에 옹정제의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祀典에 편입됨으로써 국가의 공식적인 正祠로 편입되었다. 이를 계기로 비록 劉承忠이라는 인물로 변형되기는 했지만, 江南의 劉猛將은 전국적인 民間信仰으로 발전했다. 17세기 전후의 蝗災를 계기로 殉難과 戰爭의 신에서 驅蝗神으로 변모했던 劉猛將은 蝗災에 대한 자신의 神力으로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된 것이다.
넷째, 劉猛將에 대한 國家勸力의 태도는 시기별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明末에는 官의 民間信仰에 대한 태도가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崇禎 16년(1643)에는 劉猛將을 비롯한 여러 신들이 모인 광란의 賽會에 대해서 官은 방관하고 오히려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劉猛將은 아직 淫祠였음에도 불구하고 巡撫와 知縣이 여러 차례 致祭를 올리고 있다. 淫祠에 대한 관리의 致祭를 엄격히 금한 명조의 관례에 따르면 대단히 이례적인 조치였다. 이런 움직임을 淸初까지 목격된다. 그러나 康熙 20년대 초반에 이르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湯斌에 의해 五通神과 더불어 가장 대표적인 淫祠로 규정되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雍正 연간에는 다시 변화가 나타난다. 雍正帝는 湯斌에 의해 淫祠로 규정된 劉猛將을 祀典에 편입시키고 華北 전역에 그 廟宇 설치하게 한 것이다. 國家勸力에 의해 劉猛將은 淫祠에서 正祠로 바뀌게 된 것이다.
劉猛將에 대한 國家勸力의 태도에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문제는 재해와 민간신앙, 그리고 荒政의 상호관계 속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明末에는 崇禎 14년을 전후한 극심한 기근 상황 속에서 행정당국의 구제능력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리적 공포의 배출구인 민간신앙에 대해서 억압적인 태도를 취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康熙 20년대 초반의 경우, 오랜 내란이 종식되면서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자, 오랫동안 방기되었던 民間信仰에 대해서 본격적인 통제를 가하고 있다. 40여 년 후 雍正帝는 지방의 민간신앙 중에서 국가의 체제유지에 유리한 것을 선별하여 국가제사체제에 편입시켜서 國家權力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있다. 劉猛將은 驅蝗이라는 荒政에서의 탁월한 능력으로 인해 옹정제의 선택을 받았던 것이다. 종합하면 明末에는 放棄 혹은 寬容의 방법을, 湯斌의 경우는 彈壓과 排除의 방법을, 雍正帝는 수용의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옹정제는 지방 민간신앙을 국가제사체제에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국가권력의 통제를 강화시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