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7세기 강남의 기후와 농업
[맺음말]
본고는 명청교체기를 살았던 姚廷遴의 생애를 통해서 17세기 세계적 小氷期 기후현상이 강남 농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았다. 姚廷遴은 역사상 가장 한랭한 기후의 한 가운데를 살았다. 그는 崇禎 14년의 奇荒이 발생했을 때 이웃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을 목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明朝가 멸망하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명청교체의 격변 속에서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좀 더 안정적이라고 생각했던 농업경영이었다. 그렇지만 직접 농업경영에 전력을 다했던 30년(1667~1697)은 小氷期의 한랭화 현상이 가장 극심했던 때였다.
그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17세기 후반 강남의 농업생산은 대단히 불안정했다. 小氷期의 변덕스럽고 한랭한 날씨로 작물은 자주 냉해를 입었고, 작황은 좋지 않은 때가 많았다. 30년 사이에 농업생산 기록이 있는 26년 중에 작황이 좋았던 때는 5~6년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20년은 흉작, 대흉작이었다. 특히 1680년대 말부터 1696년까지는 거의 매년 재해와 흉작이 반복되었다. 이런 사실들은 그의 농업경영이 성공적이지 못 했음을 보여준다.
17세기 후반, 기근이 발생했을 때 “賣身․賣妻子”하거나 游離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때론 打糧의 기록들도 보인다. 당시 무엇보다 특징적인 현상 중의 하나는 康熙 연간의 ‘低米價’ 현상이었다. 이러한 低米價 현상은 경제적 안정이라는 측면보다는 장기간의 경기심체, 불황에 가까운 것이었다. 강남의 농민들은 低米價로 인한 “穀賤傷農”에 시달리기도 했다. 여러 측면에서 강남의 농업생산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17세기 후반의 강남의 농업생산은 이전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재해와 흉작은 빈번했지만, 崇禎 14년과 같은 극심한 재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비록 “賣身․賣妻子” 혹은 游離와 같은 현상은 있었지만, 적어도 “食人”과 같은 극단적인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한 재해로 흉작이 발생했을 때도 미가는 대체로 안정적이었다. 이것은 명말과 같은 절대적인 양식 부족현상이 나타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빈번한 재해와 흉작에도 극단적인 재해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揚子江 중류와 상류의 미곡산지로부터 풍부한 곡물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姚廷遴은 흉작일 때도 低米價가 유지되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반대로 1679~1680년, 미가가 가장 상승했을 때는 주변의 광범위한 지역과 동시에 재해가 들었을 때였다. 강남의 곡물공급을 전 중국적인 상황 속에서 파악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곡물유통에 대한 국가의 효율적인 통제와 장악력에 있을 것이다.
姚廷遴의 歷年記에 보이는 농업생산의 불안정성에도 불구하고, 17세기 후반에 강남에서 극단적인 기근현상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청조의 대응이 대단히 효과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앞으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다만 康熙 36년(1697) 朝鮮賑濟의 예에서처럼 小氷期라는 세계적 기후현상 속에서 청조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효율적으로 이를 극복했음은 분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