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를 읽다2: 구한말 과거시험 현장을 가다
백범일지를 읽다2 조선 과거제도의 허실을 돌이켜보다
백범이 황해도 실시된 최후의 향시에 응시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꼭 120년 전, 임진년(1892)이었다. 당시 17세의 '창암'은 해주에서 거행된 과거에 참가했다. 백범일지에 묘사된 과거장의 풍경은 마음을 당혹하게 한다. 글을 짓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달랐으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명의로 과거를 치기도 한다. 백범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답안지를 작성했는데도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효'라고 여겼다.
이렇게 선생님이 짓고 접장이 쓴, 아버님 명의의 과거 답안지를 새끼줄망 사이로 시험관 앞을 향해 쏘아 들여보냈다. 그리고 나서 고거에 얽힌 이런 저런 말들을 들었다. 시험관에 대해 불평하는 말로 "통인(通引: 하급 구실아치) 놈들이 시관에게는 보이지 않고 과거 답안지 한아름을 도적하여 갔다"는 것이나, "과거장에서 글을 짓고 쓸 때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글을 지을 줄 모르는 자가 남의 글을 보고 가서 자기 글로 제출한다"는 것이다. 또 괴이한 말은 "돈만 많으면 과거도 벼슬도 다 할 수 있다. 글을 모르는 부자들이 큰 선비의 글을 몇백 냥 몇천 냥씩 주고 사서 진사도 하고 급제도 하였다"고 한다. 그뿐인가. "이번 시험관은 누구인즉, 서울 아무 대신에 편치를 부쳤으니까 반드시 된다"고 자신하는사람, "아무개는 시관으 수청 기생에게 주단 몇 필을 선사하였으니 이번에 꼭 과거를 한다"고 자신하는 자도 있었다. 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1892년 조선은 부패할대로 부패한 상태였다. 민씨정권은 매관매직하고 그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백범이 경험한 과거는 이토록 썪어빠진 조선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준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의 과거는 제대로 합리적으로 운영되었을까? 당시에 묘사된 과거의 풍경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예상에서 크게 어긋난다. 조선이 과거제도에 대한 합리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는지 깊은 의문을 남긴다. 조선의 허술한 과거시스템의 문제점은 아연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백범이 경험한 부정부패의 과거시험은 그 유래가 상당히 깊었던 것이다.
중국에도 과거시험 과정에 온갖 편법들이 동원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시스템적으로 조선과 같은 이러한 부패는 보기 어렵다. 적어도 김홍도의 그림에 보이는 과거시험의 이러한 풍경은 명나라나 청나라의 과거시험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우리는 같은 '과거'라는 이름으로 두나라의 과거를 동일한 형태로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결코 쉬이 생각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로 앞으로 충분히 보충하여 논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