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회 하멜, 조선의 소빙기를 경험하다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29> 하멜, 조선의 소빙기를 경험하다
혹한·기근에 시달렸다 구사일생 귀환
[국제신문] 2011년 11월 24일
네덜란드 출신 바로크시대 해양화가 루돌프 바쿠이젠(Ludolf Bakhuizen·1631~1708)이 그린 '폭풍으로 조난당하는 배들'(1690년).
현종 7년(1666년) 9월 4일 전라도 여수 바닷가, 한 무리 사람들이 초조하게 달이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을 틈타 담을 넘은 그들은 신속하게 배에 올랐다. 서풍과 썰물을 타고 동남쪽 바다를 향해 노를 저었다. 이틀 뒤 일본 해역에 들어간 그들은 열흘째 되던 9월 14일, 그들의 목적지였던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에 도착했다.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한 지 13년 29일 만의 일이었다.
하멜 일행이 탈출을 시도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653년과 1655년, 두 차례에 걸쳐 일부가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다시 11년이 흘러 세 번째 탈출에서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왜 조선을 벗어나고 싶어 했을까? 나가사키 부교의 질문에 하멜은 말했다. "이교도의 나라에서 불안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조선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그들은 조선 관리들에게 감시와 멸시, 그리고 가혹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더 힘겨운 것은 생존, 그 자체였다. 쌀은 국왕의 이름으로 일정하게 지급받았지만 생필품은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땔감을 해 내어 팔고 때론 구걸을 하면서 연명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괴롭혔던 것은 겨울이었다. '하멜표류기'를 보면 그들이 겨울나기에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때의 추위는 오늘날 겨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시는 소빙기였기 때문이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머물렀던 13년은 혹한의 겨울과 서늘한 여름이 절정에 달해갔던 시점이었다. 한양에서 강진 병영으로 유배왔던 1656년 4월과 5월 전라도에는 큰 눈이 연거푸 내리고, 한여름인 6월 금산과 운봉에 서리가 내렸다. 1660년 5월 황해도에 서리와 눈이 내리고 경상도 대구 칠곡 등에는 눈으로 초목이 얼어 죽었다. 이러한 한여름의 눈과 서리는 그들이 머물던 동안 없었던 해가 없었다.
겨울도 혹한의 연속이었다. 강원도 앞바다는 봄에만 두 차례나 얼어붙었다. 하멜도 그가 경험한 조선의 겨울풍경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조선의 겨울에는 우리가 1662년에 산중의 어떤 절에 머무를 때처럼 굉장히 많은 눈이 내린다. 이때 집과 나무들이 눈으로 덮여 있어서 다른 집에 가려면 눈 속으로 통하는 굴을 파야 한다." 주목해야할 것은 그곳이 강원도 산간이 아니라 남해안 강진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하멜 일행은 의복을 구하려 애를 썼지만 어려웠다.
흉작과 기근은 효종과 현종 때의 조선을 괴롭혔다. 1661년에서 1663년에 걸친 3년간 기근은 특히 심했다. 하멜은 당시 기근으로 수천 명이 죽어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이때 기근은 하멜 일행에게도 직접 타격을 주었다. 1663년 병영에서는 그들에게 지급되던 식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22명을 여수 순천 남원에 분산시켰다. 하멜은 "살려주고 죽지 않게 먹여 주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고통을 견뎠다"고 회고했다. 3년 뒤 하멜이 탈출을 감행했을 때 16명이 남아 있었다. 하멜 등 8명이 먼저 탈출에 성공했고 일본의 중재로 나머지 7명이 송환되었다.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정착했던 한 사람은 끝내 송환을 거부했다.
하멜은 13년 동안 조선의 소빙기를 경험했다. 소빙기 관점에서 그때의 선택은 옳았다. 그들이 탈출하고 4년 뒤 조선은 '경신대기근(1670~1671년)'이라는 초유의 대재앙을 겪었다. 140만여 명이 사망했던 대참극 앞에 이들 이방인이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667년 11월, 하멜은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14년 동안 커다란 불행과 슬픔 속에서 헤매다 이제 이교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우리 동족에게 되돌아가고 있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