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트레인 2011. 12. 10. 03:00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6> 1690년대 소빙기
안용복과 그 일행이 독도로 간 까닭은 ?

 

[국제신문] 2011년 8월 4일

 

 

18세기 후반 '조선도(朝鮮圖)'의 울릉도와 독도 지도. 울릉도 오른쪽에 '우산', 곧 독도가 있다. 일본 오사카부립도서관 소장.

 

 

숙종 19년(1693) 음력 3월, 한 무리 어부들이 동해의 외딴 섬을 향해 항해했다. 아침에 뭍을 떠난 그들은 저녁 무렵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 울릉도에서 며칠 동안 전복, 해삼 등을 채취하던 그들은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바다를 건너온 왜인들이었다. 동해의 고도(孤島)에서 조선과 일본 어부들이 조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바로 한 해 전에도 양국 어민들이 맞닥쳐 서로 부딪치기는 했지만 분쟁으로 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때는 달랐다. 그곳에는 안용복이 있었다.

일본 어민들이 울릉도에 들락거린 것은 1618년께부터였다. 조선 정부가 왜구의 침입을 우려해 섬에 주민들의 거주를 금지하는 '공도(空島)'조치를 유지하는 동안 일본 어민들이 그 빈 자리를 넘보았다. 17세기 후반 바다를 건너 울릉도에서 어업활동을 하는 조선 어민들은 점차 늘어났고 정부도 현실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안용복이 울릉도에 갔을 때 모두 3척의 배에 42명이 동행했다. 그가 탔던 배는 울산의 배였지만, 나머지 두 척은 가덕도와 전라도에서 온 배였다. 유치환이 노래한 "한 점 섬 울릉도"에 인근 경상도는 물론 멀리 전라도 어민들도 금령을 어기면서 바다를 건너왔던 것이다. 이제 일본 어민과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17세기 후반의 영토분쟁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대단히 격렬했다. 동해에서 울릉도를 둘러싸고 일본과 영유권분쟁이 발생했을 때, 서북변방에는 국경을 몰래 넘는 '범월(犯越)'이 큰 국제문제가 되었다. 숙종 38년(1712) 백두산정계비는 이러한 분쟁의 결과물이었다. 이 시기 영토분쟁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빙기의 기후변동과 무관하지 않다.

1690년대는 소빙기 안에서도 가장 한랭했던 시기다. 한여름 된서리 같은 이상저온으로 흉작과 기근이 빈번했고, 수탈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유랑하여 도적이 됐다. 많은 이들이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야했다. 그 과정에서 국경은 소란해지고 그 경계를 둘러싼 분쟁이 크게 일어났던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서해다. 청나라가 대만을 정복하고 이듬해인 1684년 바다에 대한 통제를 풀자 황해도와 평안도 바다에 청국 어민들이 대거 몰려왔다. 그 규모는 울릉도에 나타나는 20~30명 일본 어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해마다 여름철 수십 척의 배가 황해도 연해의 섬들에 정박하여 해삼과 방풍(약초의 일종)을 캐갔다.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던 조선은 여러 차례 청나라에 불법어업을 금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백두산정계비가 확정됐던 그 해, 강희제는 불법어업을 금지하는 강력한 명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효과는 거의 없었다. 동해에서 울릉도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은 이러한 영토분쟁 중 하나였다.

안용복은 왜인들이 우리 땅을 제 집 드나들듯 하는 것에 분노했다. 그는 일본에 납치돼 갔을 때도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당당하게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대마도는 집요하게 우리 바다를 탐했다. '죽도(竹島)'가 울릉도와 별개인 것처럼 하여, '불법어업'한 안용복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때서야 조선 정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울릉도와 죽도가 같은 것이며, 우리의 고유한 영토임을 분명히 했다.

 

사실 대마도는 훨씬 전에 조선의 바다를 '합법적으로' 휘젓고 다닌 적이 있다. 세종 23년(1441), 대마도의 집요한 요구에 조선은 현재의 거문도로 여겨지는 '고초도' 어장을 개방했다. 그들은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우리 바다에서 가져갔다. 더 심각한 것은 군사적 문제였다.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왜군에게 우리 바다의 정보를 주고 앞잡이가 되었던 것이 바로 대마도 어부들이었다. 세종이 바다를 열어준 '선의'의 결과가 전쟁의 칼날이 되어 돌아왔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