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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기근과 전쟁, 정묘호란의 한 원인

블루트레인 2011. 12. 9. 23:24

 

[국제신문] 2011년 7월 21일 

 

 

청나라 팔기군의 복장과 깃발. 1615년 누루하치가 창설한 강력한 군대다.

 

 

1627년 2월 28일 후금의 군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격했다. 조정에 소식이 전해 진 것은 나흘 뒤. 왕은 물었다. "이들이 모문룡을 잡기 위해 온 것인가? 아니면 오로지 우리나라를 치기 위한 것인가?" 대명의리를 명분으로 반정에 성공했지만, 지난 4년 동안 특별한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묘년, 그들은 왜 침입한 것일까?

인조의 말에 단서가 있다. 모문룡, 그는 명의 유민들을 이끌고 평안도 철산 앞 가도에 근거지를 세워 후금의 후방을 끊임없이 교란해 왔다. 명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앞두고 후금은 목덜미의 '골칫거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강경정책의 중심에는 홍타이지가 있다. 인조의 질문에 병조판서 장만은 홍타이지가 오래전부터 침략을 벼르고 있었음을 지적했다. 실제로 그는 아버지 누루하치와 달리 대조선 강경론자였다. 새로이 칸에 등극한 그로서는 자신의 권위를 확고하게 할 방법으로 전쟁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보다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기근이었다.

한 해 전인 1626년 기근이 들어 양식이 모자라자 도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속출했다. 기근과 반란에 분노한 누루하치는 한족들을 도살하고 무리하게 전쟁을 이끌다 대패하여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홍타이지는 전쟁을 통해 기근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 대상은 조선이었다. 초원의 몽골 부족들이 곡물을 찾아 대거 투항하고, 명과의 교역이 끊어진 상황에서 후금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조선밖에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교역이었다.

그 해 음력 6월께 청나라의 기록은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 때 나라에 대기근이 들어 쌀 1말에 은 8량이었고 백성 중에는 인육을 먹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 나라 안에는 비록 은량이 많았지만 무역할 곳이 없었다." 전황이 유리한 상황에서 후금이 급하게 강화를 체결하여 개시(開市)를 요구한 것도 이러한 절박함 때문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선조 34년(1601)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던 누루하치는 "조선에 곡물을 쌓아 놓은 것이 많다고 하니 서로 구제해주면 좋겠다"고 요청한 바 있다. 이때 많은 여진인들이 조선 땅에 몰려들었다. 사관은 여진 땅에 기근이 계속되면 돌발사태가 예상되는데도 방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우려했다. 사관의 우려가 27년 뒤에 현실이 된 것이다.

조선의 사정도 좋지는 않았다. 당시 조선은 '병정대기근(1626~1629)'이라 일컬어지는 연이은 기근이 호란과 맞물려 악화되고 있었다. 1628년 경기 황해 충청 전라도에, 그 이듬해에는 제주도에 기근이 심하여 진휼을 실시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개시를 통한 후금에 대한 원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즈음 재해를 입은 몽골부족이 후금에 투항하는 숫자가 급증하자 홍타이지는 조선에 곡물을 무역해 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이에 조선은 3000석의 곡식을 보내주었다. 그럼에도 1629년 청측의 기록에는 "해마다 흉황을 만나 변경의 안쪽과 밖에서 절도와 약탈이 공공연히 행해졌다"고 했다.

 

시야를 넓히면 1620년대 중후반의 기근 양상은 보다 선명하다. 정묘호란이 일어났던 그 해와 그 전해 일본에도 대기근이 있었다. 중국의 사정은 더욱 나빴다. 같은 시기 산서와 섬서를 중심으로 연이은 기근이 들었고, 결국 1629년 농민반란으로 폭발했다. 명조를 멸망시키는 농민반란이 이때의 기근으로 잉태되었던 것이다.

 

원하든 그렇지 않든 기근은 전쟁을 초래했고, 전쟁은 교역을 이끌어 냈다. 일찍이 클라우제비츠는 말했다. "정치적 의도는 목적이고 전쟁은 수단이기 때문에 목적이 없는 수단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역사를 살펴보면 모든 '정치적 의도'에는 경제적 동기가 도사리지 않았던가?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