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기상이변과 여성: 그녀의 세가지 소원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10> 기상이변과 여성: 그녀의 세가지 소원
1430년 이상한파 뒤'오뉴월 서리=여자의 恨'
[국제신문] 2011년 6월 23일
두아원을 원작으로 한 경극 '유월에 내리는 눈'(六月雪)에서 누명을 쓴 두아가 처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다.
그녀는 마지막 세 가지 소원을 말했다. 피가 장대 높이 매달린 흰 비단에 뿌려져 땅에는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이며, 유월 한여름에 눈이 내려 자신의 몸을 덮어 줄 것이며, 초주에 3년 동안 가뭄이 들 것임을. 망나니의 칼날에 목이 잘려나갔을 때 그녀의 소원들은 이루어졌다. 자신을 탐하려는 남자와 부패한 관리에게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두아는 죽음으로서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했다. 원나라 관한경의 희곡 '두아원(竇娥寃)'의 하이라이트이다. 유월에 내리는 눈? 아마 친숙한 말이 떠오를 것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이 말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두아의 소원들은 역사적 연원이 있다. 동해효부(東海孝婦)와 추연(鄒衍)의 고사가 그것이다. 동해군의 효부는 자살한 시어머니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는다. 그러자 그 고을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다. 연나라 왕을 충성으로 섬기던 추연은 모함으로 옥에 갇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자 한여름에 서리가 내렸다. 두아의 두 번째 소원은 추연의 고사에서 서리가 눈으로 바뀐 것이다. 흰 비단처럼 하얀 눈은 그녀의 결백을 상징하는 장치이다.
동해효부와 추연의 고사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흔하게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극심한 가뭄, 때 아닌 눈과 서리 등 절기에 맞지 않는 기상이변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원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형옥(刑獄)에 그릇됨이 있으면 하늘과 사람의 조화가 어그러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태종 13년(1413) "연나라 충신이 원망을 품으니 6월에 서리가 내리고, 동해군의 효부가 억울함을 당하자 3년 동안 큰 가뭄이 들었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하는 도리가 어찌 예나 지금이 다르겠습니까?"라는 하륜의 말은 이런 인식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오뉴월 서리의 원인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변화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세종 12년(1430)의 기록이 흥미롭다. 그해 이상기후는 특히 심했다. 음력 3월말부터 4월에 걸쳐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에 눈과 서리가 내렸고, 5월에 들어서도 여전히 추웠다. 사간원 신포시 등은 "지아비가 원한을 품으면 3년이 가물고, 지어미가 억울함이 맺히면 6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상소했다. 동해효부와 추연의 고사가 거꾸로 해석되어 여자가 한을 품으면 6월에 서리가 내리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한 역전현상이 조선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포청천으로 잘 알려진 송나라 포증의 상소문에도 이러한 착오가 보인다. 신포시 등이 포증의 글을 인용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렇지만 성종과 연산군 때에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중종 15년(1520) 음력 4월인데도 날씨가 가을처럼 춥고 날마다 서리가 내리자, 왕은 "한 지어미가 원망을 품으면 6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여 억울한 자가 없도록 전교를 내렸다 .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15세기 후반에 일반화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소빙기의 한랭화현상이 현저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마녀사냥이 심해지던 때였다. 마녀들이 이상기후를 조정했다고 한 것처럼 조선은 여름의 눈, 서리 등 기상이변의 원인으로 여성이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왜 죽음만이 두아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을까? 두아는 귀신이 되어 13년 만에 아버지를 만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관리가 되어 성공한 아버지에게 시어머니를 봉양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열녀이자 효부였고, 남성 중심의 전통적 여성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17세기 유럽에서 마녀사냥의 광풍이 불고 있을 때 여성에 대한 유교적 억압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