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트레인 2011. 12. 2. 00:50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6> 제주감귤과 소빙기
달콤하고 향긋한 제주 감귤, 백성에는 공물 고통의 열매

 

[국제신문] 2011년 5월 11일

 

 

'탐라순력도(이형상 그림. 보문 제652-6호, 1702년께) 중 '감귤봉진'. 망경루 앞뜰에서 각종 감귤과 한약재로 사용되는 귤껍질을 봉진하는 그림으로  감귤포장 과정이 잘 묘사돼 있다.

 

 

그것은 고통의 열매였다. 저주스런 달콤함이었다. 현대사의 아픔이 노란 유채꽃에 물들어 있다면, 조선시대 제주 백성들의 고통은 이 과일에 응축되어 있다. 감귤! 유럽에서 풍요와 천국의 향을 상징하던 이 과일이 오랫동안 저주의 대상이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제주도에 감귤이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삼국시대 방물로 바칠 정도로 유서가 깊다.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고려의 전통을 이어 감귤을 공물로 바치게 했다. 태종 12년(1412)에는 종묘에 천신(薦新)하도록 했다. 종묘제사와 각종 의례에 감귤의 중요성이 커져가자 남해안에 감귤을 이식하려는 시도가 진행됐다. 바로 그해와 그 이듬해 제주의 감귤 수 백 그루를 전라도 바닷가 여러 고을에 심게 했다. 이런 시도는 세종대까지 계속되었다. 세종 8년(1426)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 감귤을 재배하게 하고 관리들에게 보고하게 했다. 2년 뒤에는 강화도에도 감귤재배가 시도되었다. 이런 성과 때문인지 1432년께 사정을 반영하는 '세종실록지리지'는 감귤생산지로 제주 외에 전라도 영암, 강진, 순천, 고흥 및 경상도의 동래를 기재했다.

감귤재배의 확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100여 년이 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새롭게 감귤이 재배됐던 남해안 지역에 단지 유자만 난다고 전한다. 한때 남해안으로 확대됐던 감귤재배는 실패한 것이다. 원인은 무엇일까? 단서는 15세기 중엽의 기후변동에서 찾을 수 있다. 세조 원년(1455) 제주감귤이 바람과 추위로 "예전에 심은 것은 거의 없어지고, 새로 심은 나무는 무성하지 못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지나치기 쉬운 기록이지만 지구적인 기후변동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1453년 겨울에서 이듬해 봄까지는 극히 한랭했다. 중국 제일의 감귤생산지였던 동정감귤이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던 것이 이때였다. 1509년 겨울 혹한으로 강남의 감귤이 종자가 끊겼을 때, 우리의 제주감귤도 수확되지 않았다.

1602년 겨울 큰 눈이 내려 평지에도 60㎝ 정도 쌓이고 이듬해 봄까지 강추위가 이어져 감귤은 동해를 입었다. 사관은 제주에서 겨울이 지나도록 눈이 녹지 않는 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라 했지만, 당시 기후를 찬찬히 확인하면 더욱 놀랍다. 1732년 5월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던 정운경은 그 부근에서 수m 두께의 얼음을 발견했다. 33년 뒤 제주목사는 영조에게 제주는 여름에도 얼음을 저장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한여름에도 두꺼운 얼음이 남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후조건을 염두에 두면 제주백성들이 감귤로 고통받았던 근본요인을 이해할 수 있다. 소빙기가 시작되면서 제주감귤의 작황은 좋지 못했다. 수탈도 더 심해졌다. 관리들은 민가의 감귤이 열매가 맺을 만하면 그 수를 미리 헤아리고 손실이 있을 때는 배상하게 했다. 직접 관에 운송하게 하여 기한을 어기면 형벌을 주었다. 수탈에 진저리난 백성들은 나무를 베고 뿌리를 뽑아버렸다. 이마저 엄벌하자 끓는 물을 끼얹어 나무를 죽여 버리기까지 했다.

감귤로 인한 고통은 재배에만 그치지 않았다. 운송을 위해 험한 겨울 파도를 건너면서 숱한 사람들이 난파당하여 불귀의 객이 되었다. 소빙기의 혹한으로 감귤은 운송과정에서 쉬 얼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제주 백성에게 되돌아왔다. 1893년 진상제도가 폐지되었을 때 백성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감귤농원을 황폐화시켰다.

지구온난화가 진행되면서 세종이 꿈꾸던 감귤의 이식은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의 기후조건이었다면 감귤은 더 일찍 제주도에 풍요를 가져다주었을지 모를 일이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