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제5회 감귤, 기후변동을 이야기하다
블루트레인
2011. 12. 2. 00:44
김문기의 널뛰는 기후, 춤추는 역사 <5> 감귤, 기후변동을 이야기하다
'천하제일' 동정귤, 소빙기에 명성 추락
[국제신문] 2011년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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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 품종을 소개한 '계원귤보'(서울대 농학도서관 소장)에 나오는 동정귤. |
동정(洞庭)은 그 이름 때문에 동정호를 연상하기 쉽지만, 태호에 있는 동정산을 가리킨다. 당송 이후 동정산은 중국의 대표적인 감귤생산지였다. 동정감귤은 품질이 뛰어나 '천하제일' 혹은 '절품'으로 이름 높았다. 조선의 동정귤은 중국 강남의 동정감귤에서 유래한다.
감귤은 전형적인 아열대과수로 기후변동에 민감하다. 월평균 기온이 섭씨 0도 이하면 생장에 좋지 않고, 영하 8도 아래에서는 동해를 입고 동사한다. 이런 이유로 감귤의 생장북방한계는 기후변동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해 왔다. 귤화위지(橘化爲枳)의 고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귤이 회수를 넘어 북으로 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은 '주례-고공기'에 처음 등장한다. 춘추시대 북방한계는 회수였던 것이다. 한대의 '회남자'에는 그 경계가 양자강으로 남하한다. 온난했던 당대는 다시 회수까지 북상하여 장안 부근에도 감귤이 재배됐다. 이후 점차 후퇴하여 남송 초 '이아익'에는 양자강을 경계로 그 북쪽에는 감귤이 자라지 못한다 했다.
동정산이 중국 감귤 생산의 중심이 됐던 것은 수당온난기 덕분이었다. 당대 이후 동정감귤은 공물로 바쳐져 종묘제사에 쓰일 정도로 중요한 물품이었다. 송대는 감귤농사만 전업할 정도로 수익성 높은 경제작물로 자리잡았다. 수많은 시인묵객이 동정감귤을 칭송했고, 그 영향은 조선에도 미쳤다. 송대와 원대를 통틀어 3차례 동해가 있었지만 400여년 시간 속에서 그 빈도는 극히 낮다.
명청시대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아열대의 강과 호수가 결빙하고 바다마저 얼어붙은 일이 잦았던 만큼 소빙기의 혹한은 감귤의 생장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 시작은 15세기 중엽이었다. 1453~1454년 겨울은 강소성 북부 바다가 결빙되면서 동정감귤은 대부분 동사했다. 혹한이 거듭돼 16세기 전반에는 종자마저 끊어져 남쪽의 강서성과 복건성에서 감귤을 사들여 공물을 바쳐야했다. 17세기에는 더욱 악화됐다. 1654~1676년 여러 차례 동해로 송강부의 감귤마저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1690년 겨울은 특히 기록적이다. 강남의 강과 호수는 물론이고 양자강과 전당강, 동정호와 파양호 등이 모두 얼어붙어 복건성을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 감귤이 동사할 정도였다. 1750년께 동정감귤은 명대부터 여러 차례 얼어 죽어 다시 재배하는 경우도 드물고 품질도 떨어져 생산이 매우 적었다. 중국 감귤생산의 중심지였던 강남은 소빙기를 거치면서 오히려 수요지로 전락해버렸다.
동정감귤의 역사는 무엇을 말하는가? 감귤재배의 북방한계는 양자강보다 훨씬 남쪽으로 내려가 이전 시기에 비해 위도 1도 정도 남하했다. 동정감귤의 역사는 그 자체로 중국 기후변동의 역사를 대변한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제주에서 보내온 동정귤을 보며 그 이름에서 동정산의 봄을 상상했다. 문종이 가장 사랑했던 동정귤은 조선후기에는 시어서 먹을 수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강남의 동정감귤처럼 시인묵객을 사로잡았던 조선의 동정귤도 소빙기를 거치면서 품질이 떨어졌던 것이다.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